<3>내몰리는 상인들
편집자주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철거민 가족의 삶을 설명하는 이런 대목이 있지요. 주택 공급, 주거 환경 개선을 표방한 신도시, 뉴타운, 재개발은 가진 사람들에게는 천국입니다. 여전히 폭력적인 개발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사회. 브랜드 아파트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 혹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 이들의 마지막 흔적을 기록합니다.
서울 중구 명동성당 인근에 위치한 작은 꽃집 '베로니카 화원'. 꽃집 주인 홍정희(61)씨가 사랑하는 딸의 세례명을 따서 상호를 지은, 그에게는 오랜 삶의 터전이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열게 된 꽃집. 홍씨는 일주일 내내 휴일도 없이 가게를 열었다. 이렇게 명동에서 28년간 꽃집을 하며 번 돈으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홍씨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하다. "원래는 명동 다른 쪽에서 꽃집을 하다 상가 주인이 자신이 건물을 쓰겠다고 나가라기에 권리금 7,000만 원을 날리고 2005년 여기로 옮겨왔거든요. 그런데 또 이렇게 되다니…"
현재 꽃집은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200만 원, 권리금은 3,500만 원. 건물 주인이 건물 매각 후 철거 예정이니 나가 달라고 했고, 건물을 산 재개발 시행 예정사는 명도소송 소장을 보내왔다. 이번에도 권리금을 날리게 되면 총 1억 원 이상을 떼이게 된다.
세를 들어 장사하던 이들에게 재개발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당장 재개발 관련법이 권리금을 보호하지 않아 권리금 회수가 불가능하다. 상가정보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상가 평균 권리금은 4,074만 원이며, 장사가 잘되는 곳이라면 수억 원을 넘는다.
또 재개발 제도의 허점을 파고든 여러 꼼수들은 법이 보장하는 보상조차 상인들이 받지 못하게 악용되고 있다.
재개발 인가 전에 보상 없이 내쫓기 전략
10일 기준 착공 이전 단계에 있는 서울 내 뉴타운·재개발 등의 지역은 650곳. 베로니카 화원이 있는 서울 중구 을지로2가 163-3번지 일대 명동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제2지구(명동 재개발 제2지구)도 그중 하나다. 1983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 아직 개발되지 않고 남은 명동 내 유일한 미시행지구였는데 3년 전 상인들 사이에 재개발 관련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고로케집 사장님이 '시행예정사가 건물주들을 만나 인근 상가를 사들이고 있다'고 말해 줬어요."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2지구 내 상가 세입자들에게 차례차례 건물을 비우라는 명도소장이 도착하면서다.
보통 재개발로 인한 이주는 관리처분 인가 이후에야 이뤄진다. 재개발 지역 지정 → 정비계획 결정(결정고시) → 사업시행 인가 → 관리처분 인가 → 철거 등의 순이다. 그러나 시행예정사가 건물을 사들여 직접 소유자가 되어 재개발에 나서면 구청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세입자들에게 퇴거를 요청할 수 있다.
건물을 비우라면서 '보상'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에는 재개발로 인한 이주로 피해를 볼 상가 세입자들에게 휴업 보상금, 이전비 등을 지급하도록 명시돼 있다. 최근 3년간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삼아 감정평가사가 액수를 매기게 되는데, 최대 4개월분(보상금과 이전비 등 총합)을 준다.
그러나 대다수 이곳 상가 세입자들이 받아 든 명도소장에 적힌 청구원인은 재개발이 아니라 10년이 넘은 전체 임대차 기간이었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서는 최대 10년까지의 계약갱신청구권을 인정한다. 다음 임차인이 있다면 권리금을 받을 수 있지만, 이곳은 '다음 임차인'은 없으니 권리금을 받을 기회도 없다.
홍씨는 "38년 동안 개발되지 않고 남은 명동 내 유일한 지구여서 세입자들 역시 수십 년 동안 장사를 해온 이들도 많다"면서 "예순 넘은 여성들이 홀로 꾸려온 곳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임대 기간이 10년을 넘지 않은 상가 세입자라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
올해 8년째 세입자인 일식집 주인 강성진(45)씨와 9년째 같은 건물에서 미용실을 운영해온 남미연(73·가명)씨는 명동 재개발 제2지구 상가 중 가장 먼저 명도소장을 받았다. 건물주는 부산의 한 수녀회. 강씨는 이 건물 역시 2019년 재개발 시행예정사와 매매 계약이 이뤄졌다고 말했지만, 아직 건물 소유주는 수녀회로 되어 있다. 소장 역시 수녀회가 보냈다.
"재개발되면 이 건물은 밀리고 문화공원이 생긴대요. 그런데 재개발이 아니라 재건축을 하겠다고 나가라고 써 있는 겁니다. 당황스럽죠." (강성진씨)
2019년 설날 연휴를 앞두고 소장을 보내온 건물주는 재개발이 아닌 지어진 지 60년이 지난 노후 건물의 '재건축'을 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강씨가 1억 원에 가까운 권리금을 주고 일식집을 인수한 건 2013년이지만 재건축은 세입자의 임대차 계약갱신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사유 중 하나다. 권리금 역시 회수가 어렵다.
또 재개발과 달리 재건축은 도시정비법에서 상가 세입자에 대한 보상을 의무화하지 않고 있다. 강씨는 "(건물주로부터) 나가라는 소리도 못 들었다"면서 "명도소장을 보면 '피고들에게 이 사건 소장 송달로써 계약의 해지 통보에 갈음하고자 한다'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그는 보증금 1,000만 원에 임대료 110만 원을 내고 있다. 권리금만 9,000만 원이 들어갔다. 명동이 아닌 인근의 을지로3가역 쪽으로 옮긴다 해도 지금 규모(49.59㎡)의 매장을 얻긴 어려운 금액이다. 수천만 원의 권리금은 또 어디서 구해야 할지, 그저 막막할 뿐이다.
법대로 한다지만… "법의 한계 명확"
재개발로 인한 이주가 분명한데, 보상비 한 푼 받지 못한 채 상가를 비워야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구청에서도 "사업시행 인가 전 사인 간의 명도소송엔 개입하기 어렵다"면서 "인가가 이뤄지고 보상액이 지나치게 적다거나 하는 상황에서나 중재가 가능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서울시가 재개발 등 정비 사업에서 세입자 보호를 위해 도입한 사전협의체 제도 역시 토지 등의 소유자 방식으로 이뤄지는 사업에서는 제외다.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금으로선 사업시행 인가가 나올 때까지 버티는 것 외엔 상가 세입자가 방어할 수단이 없다"면서 "법적 한계가 분명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건물주나 시행사는 수십 억, 많게는 수조 원의 이익을 거두는 재개발 사업. 그런데도 시행사는 상가 세입자에게 가능한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고 맨몸으로 내쫓으려 기를 쓴다.
전문가들은 이런 구조가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근본적으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즉 고위험 고수익 사업인 탓이라고 본다. 김성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은 "재개발 사업은 이후 집값 등이 오르면 이익을 보는 것이고 반대라면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금의 수백 배에 달하는 금액을 사업 장래성을 보고 돈을 빌리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형태의 고금리 대출을 받아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시행사 입장에서는 당장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려 한다. 실제로 명동 제2지구 재개발을 추진하는 시행예정사의 지난해 기준 자본금은 5억 원에 불과했다.
구본기 생활경제연구소장은 "(재개발 사업에서는) 내쫓기는 세입자의 피해에 기초해서 개인 건물주나 조합 등이 이익을 얻는다"면서 "내쫓기는 세입자들의 피해를 보상해주면 건물주 등이 가져가는 이익의 크기가 줄어든다. 따라서 그들은 양보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곳곳이 화약고일 수밖에 없는 구조
상가 세입자들이 맞설 수단은 변변치 않다. 그저 조금 더 보상을 받을 때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고 버티는 일뿐. 여기서부터는 이제 물리적 충돌의 위험도 도사린다.
실제로 홍씨의 가게 인근 명동3구역의 재개발이 진행되던 2011년에도 시행사가 제시한 보상금 수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가 세입자가 수개월 동안 철거용역과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명동 재개발2지구 상인들을 만나고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씨로부터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1·2심 패소에 이어 대법원에서 그의 상가 건물 명도소송에 '심리불속행기각(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것)' 결정이 내려졌다는 내용이었다. 강씨는 "이제 언제 철거(명도집행)가 이뤄질지 모른다"면서 "어디에, 어느 곳에, 누굴 붙잡고 하소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했다.
법에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기대할 구석은 건물주의 '선의'뿐이다. 명동 재개발 제2지구 상가 세입자들에 따르면 이미 통기타 카페를 비롯한 일부 가게는 건물주와 협상해 보상금을 받아서 나갔다. 반면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문을 닫은 가게도 있다. 법이나 제도가 아닌 개인의 잣대에 의해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일은 과연 공정한가. 홍씨는 이렇게 한탄했다.
"그냥 다 건물주 맘이에요. 요새 경기도 어려운데 (세입자한테) 야박하겐 못 한다고 결정하면 논의해서 보상금 받고 나가는 거고, 아니면 바로 소장 날아오는 거고요."
◆21세기 난·쏘·공 : 글 싣는 순서
<1>살 곳 없는 세입자들
<2>생계 잃은 농민들
<3>내몰리는 상인들
<4>한국식 폭력적 개발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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