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쳇말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라는 표현이 있다. 현생에는 이렇다 할 선행이 없지만, 전생의 좋은 행위인 선업(善業)이 작용했다는 의미다. 굳이 불교를 염두에 두고 쓰는 말은 아니지만, ‘윤회’와 ‘인과(원인과 결과)’라는 불교 교리에 입각한 표현임은 분명하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기 때문에, 개인의 행위는 그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른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바로 업설이다.
‘업(業)’은 본래 ‘행위’를 의미하는 중립 단어다. 행위에는 좋은 행위인 선업과 나쁜 행위인 악업(惡業)이 있다. 이것이 누적되면 인과법에 따라 특정한 결과가 초래된다. 이를 업의 결과라고 해서 과보 또는 업보(業報)라고 한다.
이런 업보 중 악업이 초래해서 스스로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업장(業障)이다. 즉 악업에 의한 업보의 특수형태가 업장인 셈이다.
담배가 습관이 되면,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중독이 된다. 여기에서 흡연은 악업이며, 중독은 업장이다. 물론 금연을 반복적으로 시도하면, 선업의 누적으로 담배를 끊는 과보도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 중에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 만일 신이 인간을 만든 것처럼 단일한 시작점이 존재한다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신제품은 모두 동일해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은 외모와 지능 및 성격 등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
외모 등을 우리는 유전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부모와 다른 성격이나 지능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을 불교에서는 전생의 행위에 따른 개인의 유전 즉 업보로 판단한다.
유신론 종교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태생적인 차등의 존재이다. 한 번 보고 외우는 사람과 백 번 보고 외우는 사람에게, 우리는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 역사적인 위인과 천재는 우리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 있다.
유신론 종교에서 이들은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시작이 평등하지 않다면, 같은 결과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100m 달리기를 누구는 90m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은 반칙이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도 혐오하는 반칙을 신이 조장한다는 추론이 과연 타당할까?
불교는 현실적인 차이를 전생의 결과로 해석한다. 즉 현재 직면한 불편부당함도 사실은 내가 과거에 만들어낸 결과, 즉 업보라는 말이다. 마치 오늘의 내가 골초인 것은 어제의 내가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그렇다면 윤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불교는 이러한 판단을 우리가 사는 현실을 살펴보는 것으로 추론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성적이 오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인과를 좀 더 큰 사이클로 확대해 보자. 이렇게 되면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은 전생에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관점이 도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윤회에 따른 판단이다. 즉 현재의 불평등을 이해하는 합리적 판단 속에, 윤회라는 원인이 딸려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를 말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것은 현생이지 전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면 좋겠지만, 반대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어쩌겠는가! 이미 그렇게 한 사건을 바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불교는 윤회라는 전체적인 구조를 배경으로 현생에서의 최선을 찾으라고 강조한다. 즉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는 말처럼, 현생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주체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오늘의 노력은 또 다른 내일의 업보를 산출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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