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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 말은 사주팔자에서 연유됐다. 생활 속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과 행동, 관습들을 명리학 관점에서 재미있게 풀어본다.
‘오뉴월 개 팔자’는 남들 일할 때 편히 놀고 있는 사람을 빗댄 표현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창 바쁜 농번기에 그늘에서 잠자는 개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개 팔자’가 다 ‘상팔자’는 아니다. 행복하게만 보이는 개도 실제로는 팔자가 나뉜다. 또 하나의 가족으로 대접받는 반려견도 있지만 버려지는 유기견, 식용견도 있기 때문이다.
개도 있는 팔자가 사람에게 없을 리 없다.
중국 한나라 때의 왕충(王充)은 한 번 읽은 책은 그대로 암기를 하는 천재였다. 유물론자인 그는 천인상관설이나 음양오행설 등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정했다. 하지만 왕충도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머리와 눈이 있고 혈기를 지닌 동물이라면 운명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빈천해질 운명이라면 부귀하게 해주더라도 화를 만나고, 부귀해질 운명이라면 비록 비천하게 해도 복을 만난다. …귀하게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은 남들과 함께 배워도 홀로 벼슬을 하고, 함께 관직을 나가도 혼자 승진한다. 부자가 될 운명을 지닌 사람은 남들과 함께 구해도 혼자 얻게 되고, 일을 같이해도 홀로 성공한다. 빈천의 운명을 지닌 사람은 이와 상황이 다르다. 어렵게 일을 얻고 성취해도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고, 질병으로 뜻하지 않게 재산을 잃게 돼 지녔던 부귀마저 상실하고 빈천하게 된다.”
사주(四柱)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干支)로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주에 ‘기둥 주(柱)’를 쓴 것은 주택처럼 연월일시 네 기둥 안에 그 사람의 운명이 기거한다는 의미이다. 연월일시를 60갑자로 표기하면 여덟 글자(八字)가 된다. 따라서 사주와 팔자는 동의어다.
사주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당나라 때 사주의 학문적 기초가 만들어졌다. 사주학은 당면한 문제나 짧은 미래를 점(占)치는 타로나 신기(神氣)와는 다르다. 사주는 사람의 일생을 연구해야 하는 특성상 많은 자료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수나라를 거쳐 당대에 갑자기 형성된 이론이 아니라 전국시대를 기원으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연월일 삼주(三柱)에 연주를 중심으로 한 당(唐)사주에서, 송나라 초기 서자평(徐子平)이 시(時)를 더한 사주에 일간(日干, 생일 위 글자)을 중심으로 한 이론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현대의 사주학은 대부분 자평법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사(正史)에서 ‘사주’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신의왕후 한씨가 복자(卜者) 문성윤에게 아들 이방원(태종)의 사주를 물어보는 대목이 나온다. 복자가 답하기를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쟁이들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태종실록)
조선 초 과거제도에는 음양과(陰陽科)에 명과학(命課學)이 필수였다. 관직명은 명과학훈도와 교수였고, 관상감의 정9품과 종6품 벼슬이었다. 과거 합격자에게는 권지(權知)라는 관직이 제수됐다. 이들 중에 실력이 뛰어난 자는 국복(國卜)에 선출돼 왕족과 관리들의 명운 상담을 했다.
사주학은 한자와 음양오행설 등에 정통해야 했던 만큼 학식이 높았던 엘리트 계층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 때 대제학인 변계량이 사주에 정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주학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명리학(命理學), 중국은 산명술(算命術), 대만은 명학(命學), 일본은 사주추명학(四柱推命學)으로 불린다. 동양적이고 옛것이라고 모두 비과학적이며 미신은 아니다. 명리학이 1999년 대학에서 제도권 학문이 된 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다.
점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다양하다. ‘허황된 미신’이라는 부정론과 ‘팔자 도망은 못 한다’는 맹신론이 있고, 선택적 절충론도 있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점을 보는 것과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크게 다를 것 같지만, 과학의 목적도 결국 예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본래 복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은 연전에 복자들이 말하기를 ‘7, 8월에 액이 있다’고 하더니, 7월에 병이 발생하였다. 복자가 또 이르기를 ‘올해도 역시 액이 있다’해서, 연희궁으로 옮겨 이를 피하려 했으나 또 질병을 얻었으니, 복자의 말이 허망하지 않은 것 같다.”(세종실록)
세종대왕의 경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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