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넷플릭스 '필 굿'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한국일보>
내가 넷플릭스에서 제일 좋아하고 가장 즐겨보는 장르는 스탠드업 코미디쇼다. 세계 각지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구독료를 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추천이 필요하다면 일단 코미디의 의미와 코미디언의 역할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분명한 웃음과 훌륭한 이야기가 있는 해나 개츠비의 '나의 이야기'부터 시작이다. 넷플릭스 코미디 스페셜로 인생 역전을 이룬 사람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앨리 웡의 쇼 두 편은 꼭 순서대로 봐야 한다. 트레버 노아의 쇼를 통해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역사까지 배울 수 있고, 하산 미나즈의 이야기에는 미국 이민 2세대의 삶이 녹아있다.
웃음은 만국 공통의 언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코미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가장 어려운 장르다.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야기를 한 시간 가까이 듣고 있는 일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우선 15분이나 30분 분량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장르 자체에 익숙해지기를 추천한다. 역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세상 웃기는 코미디언들'은 세계 각국의 코미디언들이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앤솔로지 쇼다. 특히 인도의 여성 코미디언인 아디티 미탈의 쇼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30분 분량의 콘텐츠 중 하나로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영국 편에서는 메이 마틴의 쇼가 가장 인상적이다. 영국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캐나다 출신의 메이 마틴은 30분 안에 풀어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게 아닌가 싶은 '중독'을 소재로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필 굿'은 메이 마틴이 쓰고, 스스로 메이 마틴이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시리즈다. 지난 6월 4일 두 번째 시즌이 공개됐다. 설정에서 예상되듯 2주 전 소개한 라이언 오코넬의 '스페셜'과 마찬가지로 메이 마틴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따라서 메이 마틴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필 굿'의 배경이자 예고편이면서 스포일러다. 대상을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중독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자기 자신을 여자나 남자로 정의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 사람, 메이 마틴은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또 사랑할까. '필 굿'은 이 질문에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더 긴 이야기와 복잡한 감정으로 대답한다.
메이는 영국의 작은 코미디 바에서 공연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공연이 끝난 밤, 공연을 보러 왔던 조지(샬롯 리치)를 만난다. 둘은 곧바로 사랑에 빠져 연애를 시작하고, 메이가 조지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동거를 하게 된다.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가 마약 중독자였을 뿐만 아니라 마약 판매로 감옥을 다녀오는 등의 어두운 시절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조지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조금씩 복잡하고 어려워져 간다. 여기까지가 첫 시즌의 첫 회다.
'필 굿'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로 분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감정이 커지는 과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사랑에 '빠진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다. 그리고 문제는 빠진 다음에 벌어진다. 사랑에 젖어버린 우리가 있다. 과연 우리는 지금부터 같이 헤엄쳐서 어딘가로 갈 수 있을까. 혹시 우리가 비슷한 수영 실력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과연 나는 또 당신은 어느 정도 깊이까지 빠지기를 원할까. 상대가 무릎까지 오는 높이의 물에서 가볍게 첨벙거리기만을 원할 때 나는 더 깊은 곳에서 힘껏 헤엄치고 싶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우리, 구명조끼는 가지고 있나.
연애라는 관계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대충 발만 담그고 빠져나올 수 없다. 메이는 둘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 노력에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한 정기적인 상담 모임에 참여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조지도 마찬가지다. 메이를 만나기 이전에 관계 맺던 사람들과 가족에게 연인의 존재를 계속 숨겨서는 안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지점에서 '필 굿'은 이성애든 동성애든 퀴어 연애사든, 이전에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갔던 길을 가지 않는다.
성소수자인 주인공과 그와의 연애를 공개하기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연인이 있을 때, 후자의 인물이 사회의 편견을 사랑의 힘으로 뛰어넘는 서사는 '필 굿'에 없다. 이 상황에서 더 초점이 맞춰지는 건 연애에도 중독되어 있는 메이의 상태이다. '필 굿'은 외적으로 봤을 때 동성 간의 연애로 보이는 연인 관계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 안의 개인이 가진 구체적인 문제에 주목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며 내가 가진 문제는 무엇인가. 나의 문제는 나의 연애에, 관계에,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필 굿'의 관심사는 여기에 있고, 코미디의 의미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필 굿'의 장르는 퀴어 로맨틱 코미디라기보다는 현재 2030세대를 지칭하는 말인 밀레니얼 로맨틱 코미디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정확할 것 같다. 나 자신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세대이며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직업이기까지 한 인물이, 연애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을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쓴 드라마로 만든 작품인 것이다. 중독의 문제는 두 번째 시즌에 이르러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확장되고, 지금의 내가 겪는 문제의 원인으로 과거가 불려 나온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메이는 자신을 성 정체성이나 젠더로 구분하지 않고, '나는 나'로 말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와 연결이 되어 있는 한, 나에 관해 말하는 일은 오직 나에 관한 것만은 아니게 된다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 그러고 나서야 문제를 마주 보고, 하루하루를 감당하는 방법을 배운다.
다시 스탠드업 코미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필 굿' 속 메이는 "모든 사람은 양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있고 성적 취향이란 건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라서 살면서 변할 수도 있다"라는 "최신 유행의(trendy)" 소재를 가지고 나 자신과 나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코미디 무대에 올린다. 그리고 바로 그 이야기 때문에 한 차례 조지와 이별을 겪는다.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이해의 영역을 넓히는 만큼이나 오해의 여지를 남기는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낼 때 실제의 나에게서 출발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이 세대의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픽션의 세계에서조차 끝내 '나의 이야기'를 하려는 인물들이 가장 최신의 이야기를, 보통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코미디는 세상의 변화에 가장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장르이고, 웃음의 유효기간은 짧기 때문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나를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멀리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코미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 굿'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형태로 내가 다시 쓰는 과정을 거쳐 픽션으로 만들어낸 성공적인 예시다. 물론 어떤 순간에는 이렇게까지 나 자신의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는 메이와 조지에게 바로 윗세대인 한 친구는 이렇게 지적한다. "두 사람과 함께 놀면 재미없어요. 오직 자신들만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잖아요." 이건 일종의 자학개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그게 최신 유행이고, 밀레니얼 세대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인 것을.
이제 2030세대조차 아니게 되는 나이의 나지만, 밀레니얼 세대의 시작점 언저리에서 결국 '나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에 매혹을 느끼지 않을 도리는 없다. 실패하고 실수하는 나를 인정하고, 과거가 미래를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은, 변한다. 모든 변화가 성장일 수는 없지만, 이 경우에는 분명한 성장이다. 그리고 나는 스탠드업 코미디만큼이나 성장드라마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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