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서민들에게 도시는 살기도(live), 사기도(buy) 어려운 곳이 되고 있습니다. 부동산은 치솟고 거주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이런 불평등과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도시 전문가의 눈으로 도시를 둘러싼 여러 이슈를 하나씩 짚어보려 합니다. 주택과 부동산 정책, 도시계획을 전공한 김진유 경기대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 번씩 연재합니다.
<21> 용도지역제 변해야 도시가 산다
땅을 어떻게 쓰는가는 나라의 흥망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다. 국토의 균형발전을 꾀하고 공익을 해치는 토지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상하수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비위생적인 도시구조는 페스트나 콜레라 같은 감염병 확산의 주범이었다. 산업혁명 시기 공장들이 뿜어내는 스모그는 많은 시민을 희생시켰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 용도지역제다. 토지의 위치에 따라 허용하는 행위와 금지하는 행위를 정해놓음으로써 산업발전도 도모하고 주거환경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맞지 않는 구태의연한 용도지역제로 인해 도시 발전과 지속 가능성을 가로막는 사례가 늘고 있다. 주거지역인데 식당이 즐비하고, 상업지역에 들어선 주상복합건물은 아파트와 다름없다. 이미 용도지역제가 무력화된 것이다.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용도지역제의 탄생
토지를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인류 정착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농지와 주거지의 분리가 대표적이다. 고대 유적들을 보면 아무데나 집을 짓고 논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름의 공간 질서와 체계를 갖추고 있다. 고대인의 무덤인 고인돌도 특정 장소에 모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일종의 공동묘지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족장이나 마을 어른들의 합의를 통해 중요한 토지 이용을 결정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토지 이용 규제인 용도지역제(Zoning)는 산업혁명으로 공업화가 가속화되던 1810년 독일에서 시작됐다. 라인(Rhein)강변 도시들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주거환경을 지키고자 했다.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한 이 시기의 공장들은 공해와 소음의 주범이었는데 주거지역을 이들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이후 1845년에는 프러시아공업법이 제정돼 용도지역제의 기초가 마련되고 1800년대 말에는 밀도와 높이도 규제하기에 이른다.
유럽에서 시작됐지만 용도지역제가 꽃을 피운 곳은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주는 화재 위험이 있고 주거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중국인 세탁소를 규제하는 조례를 1885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가장 큰 명분은 주거환경 보호와 자산가치 하락 방지였다. 처음에는 12명의 이웃 주민으로부터 허락을 받으면 시내 주거지에서도 영업을 할 수 있었으나 이후에는 공업지역이나 시 외곽에서만 세탁소를 운영하도록 제한됐다.
점차 역할이 확대되던 용도지역제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다. 1922년 한 부동산회사(Ambler Realty Company)가 용도지역제 적용에 반발해 소송전을 시작한 것이다. 오하이오주에 있는 유클리드 마을 의회는 마을 전체에 용도지역제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 부동산회사 소유지 중 일부를 주택만 지을 수 있는 용도로 지정했다. 그러자 부동산 회사는 토지 규제로 땅값이 하락해 사유재산권을 침해당했다며 소송을 냈다. 법정 공방 끝에 1926년 미국 대법원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토지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은 미국에 용도지역제가 널리 퍼지는 기폭제가 됐다.
우리나라 용도지역제
우리나라에 용도지역제가 도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이다. 도시계획에 관한 최초의 법령인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되면서 ‘주거, 상업, 공업’ 등 3개의 용도지역과 ‘풍치, 방화, 미관, 풍기지구’ 등 4개의 용도지구를 도입했다. 이 법은 건축물 용도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한 원칙을 밝히고 있지만 개발 규모에 대해서는 대지 안의 공지나 건축선 정도만 언급하고 있다. 아직 층고나 용적률에 대해서는 규제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가장 높은 건물인 화신백화점이 5층이었으니 말이다.
높이를 제한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도시계획법’과 함께 ‘건축법’이 분리 제정되면서부터다. 주거지역의 건축물 높이는 20m, 기타 지역은 35m가 허용 한계였다. 당시 건축법에도 용적률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이때는 층마다 면적이 다른 경우가 거의 없어서일 것이다. 층별 면적이 같다면 1층 면적과 층수만 통제하면 용적률도 자동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60년이 흐른 지금, 용도지역제는 세분화돼 전국의 모든 토지에 적용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법인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만 보더라도 21개 용도지역, 26개 용도지구, 4개 용도구역이 등장한다. 군사시설, 문화재 보호구역 등 다른 법이나 조례에 규정된 지역이나 지구를 포함하면 무려 700개가 넘는다. 저마다 합리적인 근거를 대며 용도와 밀도에 제한을 가하고 있지만 이렇게 많은 규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땅에는 과도한 규제가 가해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허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원칙은 지키되 시대상은 반영해야
보통의 경우, 땅의 용도에 대해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다.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장과 주거가 혼재된 도시에 살면서 큰 희생을 치렀다. 스모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지금도 많은 대도시에서 미세먼지가 시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공해를 발생시키는 용도를 주거지와 분리해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다.
개발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도 최소한의 삶의 질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다. 대지에 건축물이 꽉 들어차면 건물 사이에 공간이 없어 통풍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옆집과 너무 가까우니 창문도 마음대로 못 연다. 옆에 너무 높은 건물이 있어도 프라이버시 침해가 일어난다. 높은 집이 남쪽에 있다면 북쪽 집은 햇빛을 볼 수 없으니 어둡고 습하다. 정신적으로 우울해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기존의 제도를 그대로 두자는 의미는 아니다. 땅의 용처는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중국인 세탁소를 규제하던 캘리포니아주의 조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산업구조 고도화로 공업지역도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구로동은 어느덧 ‘공단’의 모습을 벗고 복합 업무 중심지로 거듭났다. 주상복합건물과 다양한 문화 예술기능을 가진 지역으로 바뀐 성수동의 변화 또한 눈부시다.
서울의 도심도 용도지역을 손볼 기회를 맞이했다. 세계적인 도심 회귀 현상으로 주거수요가 폭발하고 있고 마침 정부가 도심주택 공급을 활성화하겠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기존의 용도지역을 유지한 채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이 기회는 일종의 시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수십 년째 대규모 상업지역을 유지하고 있는 도심 곳곳은 밤이 되면 인적이 뜸하다. 반면 강남은 대로변의 상업지역과 블록 안쪽의 주거지역이 조화를 이뤄 24시간 활기가 넘친다. 용도지역 규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례다.
용도지역제, 이제는 혁신해야
혁명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용도지역제는 시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구로와 성수는 여전히 ‘준공업지역’이고 최첨단 산업이 집적된 판교테크노밸리는 ‘준주거지역’이다. 육상선수에게 수영복을 입힌 꼴이다. 뛰지 못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의 결과를 내긴 어렵다. 이제 현실에 맞는 새롭고 혁신적인 용도지역제를 마련해야 한다. 아무거나 다 된다거나 건물 형태만 보겠다는 두루뭉술한 정책은 안 된다. 성수나 판교테크노밸리 같은 곳은 ‘융·복합산업지역’이라는 용도지역을 신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합리적인 토지 이용은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서로 상생하는 용도를 발굴해 집적시키고 상충하는 기능은 거리를 둬야 한다. 매일 수백 개의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용도지역도 이에 맞춰 변하지 못한다면 혁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낡은 틀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를 담을 수 있는 용도지역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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