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물이 귀한 세상이다. 돈을 내고 물을 사 먹는 이 시대에 ‘돈을 물 쓰듯 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물이 대접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물을 살리기 위해 지구의 여러 나라가 힘을 보태는데, 개인으로서 일상생활에서 도울 수 있는 일도 있다. 수질 오염원을 찾아보니 마요네즈, 간장, 사용하다 버리는 기름, 된장국, 청주 등이 보였다. 음식을 남겨 하수구에 버리는 것은 곧 지구의 혈관을 막는 일인 셈이다. 간장을 버리면 물 3,000배가 더 있어야 수질을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된장국은 7,200배, 청주는 4만 배, 사용하고 남은 기름은 약 20만 배 등 버리는 양에 최소 수천 배의 물이 더 필요하다는 것은 정말 놀랄 일이다.
이처럼 물은 무엇을 묽게 할 수 있다. ‘묽은’ 상태가 되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뭍’에다가 ‘묻다’라는 행위를 할 수 있다. 발로는 밟는다. ‘발’을 들었다 놓으면서 어떤 대상을 누르는 것이 ‘밟다’이다. 이쯤 되면 물증은 없어도 이들 말이 연관성이 있다는 심증이 굳어진다. 우리말에는 이름을 나타내는 말이 그대로 움직임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예가 꽤 있다. 우리는 ‘신’을 ‘신’고, 머리를 ‘빗’으로 ‘빗’는다. ‘띠’를 두르면서 ‘띠다’라 한다.
물질만이 아니다. 추상적인 말도 이름이 행위를 그대로 그려 낸다. 품속에 넣거나 가슴에 대어 안는 ‘품다’는 ‘품’에서 온 말이다. ‘안다’는 ‘안’에서, ‘배다’는 ‘배’에서 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품다, 안다, 배다’는 모두 부모와 아이를 연상하게 한다. 아이란 부모가 열 달을 배 속에서 키우고, 집이라는 울타리 안과 부모라는 품속에서 고이 길러낸 존재라는 것을 여러 말에서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이 물을 더럽히지만 물은 물로 물을 정화한다. 물의 힘을 빌려야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 순서는 다르지만, 사는 것이 곧 삶이라는 ‘살다’와 ‘삶’의 관계와 같다. 물은 물을 묽게 하고 시간과 함께 물을 맑게 할 유일한 존재다. 오염된 물이 깨끗해지는 것을 자정(自淨)이라 하는 것도, 자정 능력에 물이 소환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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