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악습 지적한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내래... (전쟁 목적을)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근데... 너무 오래 돼서... 잊어버렸으.”
영화 ‘고지전’(2011) 속 인민군 장교 현정윤의 대사
호국보훈의 달인데, 군대가 시끄럽습니다. 군대 부실 급식과 여성 부사관 성추행 사건이 고개 젓게 만듭니다. 국가 안보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대우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요즘 군대 좋아졌다”는 말이 군대 상급자들과 제대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나오지만 과연 군대가 좋아졌는지 의문입니다. 군대에서 발생하는 문제 8할이 폐쇄적인 병영 문화와 헛군기에 집착하는 악습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태와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부실 급식과 성추행 사건 같은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쪽에서☞ 인적사항 뺀 성추행 보고, 면담 0건… 군기 제대로 빠진 軍)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2005)는 그릇된 병영 실태를 되돌아 보게 만듭니다. 윤종빈 감독이 중앙대 졸업작품으로 만들어 2006년 제59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은 영화입니다. 군대생활을 실감나게 묘사해 화제가 됐던 수작으로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볼 수 있습니다.
①악습은 누가 바꿀 것인가
영화의 중심인물은 태정(하정우)과 승영(서장원)입니다. 둘은 중학교 동창입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가 군대에서 병장과 이병으로 재회합니다. 태정이 제대하고 1년 후 상병이 된 승영이 태정에게 만나자고 전화합니다. 태정은 승영이 불편합니다. 여자친구 지혜(김서희)를 굳이 불러 함께 만나는데, 승영은 태정에게 단 둘이 할 말이 있다며 매달립니다.
군대시절 태정은 후임병 단속에 능숙합니다. 선임병이 “군생활 잘한다”고 흡족해 할 정도입니다. 태정은 딱히 비뚤어진 인물은 아닙니다. 군에 있는 동안 되도록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어할 뿐입니다. 막 부대에 배치된 승영에게 하는 조언은 그의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처음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고, 싸라면 싸면 돼.”
승영은 태정과 정반대입니다. 군대의 불합리한 일에 눈감지 않습니다. 선임병의 악행에 바로 분노를 터트립니다. 태정은 승영의 언행이 불안합니다. 승영을 감싸다가 내무반 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태정은 그렇게 행동하다 고참이 되면 너만 힘들어진다는 식으로 승영에게 말합니다. 승영의 답은 이렇습니다. “어차피 고참되면 내가 다 바꿀 거야.”
②연대의식 내세우며 구성원 안 챙겨
승영은 자기 말대로 후임병 지훈(윤종빈)을 잘 돌봐줍니다. 지훈이 여자친구에게 전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든 일은 자신이 대신합니다. 고참들은 그런 승영이 못마땅합니다. 자꾸 말대꾸하고 덤비는 승영이 후임병 관리도 소홀히 해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을 존중하지 않고 개인을 우선시한다고 뒷말을 하기도 합니다.
승영의 언행은 사회라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는 자신의 새 팬티를 훔쳐 입은 병장에게 문제 제기를 하고, 지훈을 성추행하는 말년 병장 수동(임현성)의 추태를 저지하기도 합니다. 태정에게 쓴 편지를 빼앗아 내무반에서 크게 읽어 망신을 주는 수동에게 덤비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렇다고 고참한테 개겨?” ““싸가지 X나 없네”입니다.
군대의 부조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승영이 성추행한 수동과 말싸움을 하는데, 태정이 끼어듭니다. 태정은 수동과 언성을 높이다가 몸싸움까지 합니다. 이 모습을 발견한 소대장이 징계를 내리는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명백히 잘못한 수동을 비롯해 피해자인 지훈, 태정, 승영이 완전군장을 하고 연병장을 돌게 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고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는데, 조직을 위해 참아달라거나, 피해자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성 부사관 성추행 사건에 엉뚱하게 대처한 공군 지휘부를 떠올리게 합니다(자세한 내용은 이쪽에서 ☞ 시험대 오른 '부사관 성추행 사건' 수사… '2차 가해' 입증이 관건).
연대의식을 앞세우는 군대 문화는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집단 내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 내 연대의식이 허울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승영은 태정이 제대한 후 태도가 바뀝니다. 보호자가 사라지자 혼자 살 궁리를 찾습니다. 고참들에게 싹싹하게 대하며 새 군화와 군복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그런 승영에게 고참은 “이승영, 너 군생활 이제 열심히 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승영은 예전처럼 지훈을 챙기지 못합니다. 군대 위계문화를 적극 따르게 되면서 지훈을 강압적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건너 뛰고 싶으시면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 마음 둘 곳 없는 지훈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지훈은 낙담해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지휘관과 선임병들은 연대의식 운운하면서도 후임병 한 명도 제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③군대 좋아졌다는 말이 없어져야
☞승영은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는 밑에 애들 들어오면 정말 잘 해줄 거야”라는 다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데 고뇌하는 사람은 승영뿐 입니다. 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를 개인이 홀로 떠안은 셈입니다. 악습을 바꾸겠다고 마음 먹고, 일부 실천까지 했던 선한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격입니다. 승영은 태정을 만나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태정은 “군대에선 어쩔 수 없어” “정신차려 새끼야, 남자새끼가” 같은 냉정한 말만 합니다. 둘의 어긋난 대화는 군대의 구조적 문제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영화에선 “요즘 군대 좋아졌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선임병이 후임병의 언행을 지적할 때 쓰입니다. 예전에는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비아냥으로 저 말을 활용합니다. 어떤 이들은 군대가 좋아져서 전투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예전보다 위계질서가 흐트러지고 군기가 빠져 군대답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고생하는 곳이니 부실하게 먹고 자고 입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태정이 군대 무용담을 털어놓은 장면은 제대자들이 갖기 마련인 이런 인식을 드러냅니다.
“너희들 더 참고 더 견디고 더 어금니 막 악 다물자, 난 그러면서 그들(후임병들)을 이끌어 왔단 말이야. 반찬도 물론 말도 안되. 밥 먹을 때 무말랭이 하나 딱 나와 가지고…”
“군대 좋아졌다”는 말은 군대가 좋아지면 안 된다는 인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더 개선할 점이 없으니 내버려둬도 좋다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용서 받지 못한 자’가 상영됐던 2005년에도 사람들은 “군대 좋아졌다”는 말을 했습니다. 최근 군대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과연 군대는 좋아졌나 의문입니다. “군대 좋아졌다”는 말이 없어져야 군대는 정말 좋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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