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하도급 금지 현장에선 유명무실]
전문건설업체 '도급 이사'가 재하도급 과정 주도
현장에선 중간관리자가 쥐어짜… 안전은 등한시
철거 중이던 건물 붕괴로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광역시 동구 재개발사업 과정에 불법 재하청이 이뤄진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재하도급을 금지한 건설안전기본법이 현장에서 유명무실하다는 건 건설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업체마다 재하청 전담자가 있어 단가 후려치기와 서류 조작을 일삼고, 재하청 일감을 맡은 현장에선 빠듯한 공사비와 공사기간을 맞추려 안전을 등한시하는 일이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급 이사'가 불법 재하청 주도
14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대형 공사는 일반건설업체가 전체 공사를 수주한 뒤 분야별로 특화된 전문건설업체에 하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광주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의 경우 현대산업개발이 수주해 철거 공사는 그 분야 전문건설업체인 한솔기업에 하청을 줬다. 하지만 실제 사고 건물 철거는 백솔기업이 진행한 것으로 확인돼 재하도급 의혹이 불거진 상황이다.
복수의 건설현장 노동자들은 전문건설업체를 대변하는 '도급 이사'가 불법 재하청 과정을 주도한다고 말한다. 업계에서 'PM(프로젝트 매니저)'으로 불리는 이들은 재하청업체에 최저 수준의 공사비와 공사 기간을 낙찰하고 인부들이 직고용된 것처럼 서류를 꾸미는 일을 담당한다. 30년째 타설 작업을 해온 A(49)씨는 "전문건설업체에 소속된 도급 이사도 있지만, 대개 브로커처럼 2~3개 업체를 오가며 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무리한 비용·기간 단축은 곧잘 사고로 이어지지만 도급 이사가 형사처벌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A씨는 "1만5,000원짜리 단가를 8,000원으로 맞추고, 현장팀장에게 공사 기간 단축을 압박하는 일이 다 도급 이사의 몫"이라며 "정작 일이 터지면 모든 책임은 현장 선에서 진다"고 말했다.
중간관리자는 인부 몰아쳐 일당 남겨
불법 재하도급 구조는 현장의 열악함과 직결된다. 경기 성남 지역에서 타설 작업을 20년 넘게 해온 B씨는 지난해 재건축 공사장에서 현장팀장 지시에 따라 닷새치 작업을 이틀 만에 끝낸 경험이 있다고 했다.
B씨는 "원청에선 실제 일이 얼마나 걸리느냐와 관계없이 5일치 일당 50만 원을 팀장에게 준다"며 "팀장 입장에선 밤새 인부들을 부려 이틀 만에 일을 끝내면 남은 3일치 일당을 자기 몫으로 챙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하청 과정에서 이미 반토막 난 공사비에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남기려는 중간관리자의 이런 착취 행위를 업계에선 '야리끼리('완수하다'라는 뜻의 일본어에서 파생)'라고 부른다.
공기 단축은 원청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한다. 충남에서 21년간 거푸집 해체 현장팀장으로 일해온 김모(53)씨는 "아파트 한 동의 거푸집을 해체하는 동시에 다른 동의 거푸집을 짜려면 새 자재가 필요하다"며 "이 때문에 원청에선 통상 일주일이 걸릴 현장 해체를 2~3일 만에 끝내고 여기서 나온 폐자재를 다른 동에 전용하라고 하는 식"이라고 밝혔다.
"재하청 21년간 직고용 다섯 번도 안 돼"
무리한 하청을 받아 인력을 부리는 현장팀장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김씨의 팀원 중 한 명은 지난해 고층부에 비계(발판)를 설치하지 않은 채 파이프만 걸쳐 놓고 외줄타기 하듯 거푸집 해체 작업을 하다가 추락했다. 갈비뼈 7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원청엔 눈치 보느라 치료비도 청구하지 못했다. 김씨는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가장 먼저 없애는 게 비계와 같은 안전 시설물"이라고 말했다.
재하도급 과정의 근로계약도 현장 인부를 위험으로 내몬다. 도급 이사는 서류상 직고용을 한 것처럼 위장하려 모든 인력에게 근로계약서를 받는데, 여기엔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최저 인건비가 적히는 게 보통이다. 김씨는 "시간 내 물량을 맞추지 못하면 계약서에 명기된 최저 일당을 받고, 빨리 끝내면 더 많이 가져갈 수 있게 해준다는 식"이라며 "이런 이면 계약은 모두 구두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20년 넘게 현장팀장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팀이 전문건설업체에 직고용돼 일한 경험은 다섯 번도 안 된다고 했다. 그마저 김씨 팀이 도저히 시간과 비용을 맞출 수 없어 작업에서 빠지겠다고 했더니 업체가 억지로 직고용한 경우라고 한다. 김씨는 "직고용은 둘째치고 정상적 수준의 단가라도 서류상으로 보장해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최저낙찰제부터 폐지해야"
전문가들은 '현장 쥐어짜기'의 근본 원인인 최저낙찰제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강한수 건설노조위원장은 "현재는 관급 공사에서 발주기관이 원청에 일을 줄 때만 최저낙찰제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민간 공사와 관급 공사를 가릴 것 없이 공사 전 과정에서 상식적인 비용과 기간이 보장되도록 최저낙찰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법 재하도급을 부추기는 악습을 끊어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는 "음지에서 알음알음 공사를 따내고 무리한 진행을 부추기는 관행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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