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휘주 문화 ④ 황산시 둔계와 이현 서체
서쪽에서 횡강과 율수가 흘러온다. 신안강과 만나 동쪽으로 흐른다. 세 강의 교차 지점에 둔계(屯溪)가 있다. 예로부터 동서남북 어디로든 연결되는 사통팔달이었다. 자연스레 상업이 꽃피던 휘주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1988년에 안후이성 남부 3개의 구(?)와 4개의 현(?)을 묶어 황산시가 됐다. 둔계구에 시 정부가 위치한다. 여기에 라오제(老街)가 있어 휘주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활기 넘치는 옛 상가, 맥을 잇는 휘주 상인
라오제로 들어서니 휘주에서 생산되는 차 향기가 코를 즐겁게 한다. 명차 반열인 황산마오펑(?山毛峰), 치먼훙차(祁??茶)를 어디서나 시음하고 구매할 수 있다. 치먼에서 만드는 홍차는 유럽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입맛에 맞아 베이징에 거주할 때에도 늘 구해서 마셨다. 찻집 안을 둘러본다.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는 딩구다팡(?谷大方)이나 꽃잎처럼 생긴 황산녹목단(?山?牡丹), 두보의 시가 연상되는 진산스위(金山?雨)도 보인다. 종류도 많고 상품 가치도 높아 휘주 차상(茶商)의 든든한 품목이 됐다.
휘주에 가면 꼭 사는 차가 있다. 타이핑허우쿠이(太平?魁)다. 생김새가 길쭉하게 생겼고 잎을 그냥 먹어도 과자처럼 바삭하다. 녹차는 물에 우리지 않고 그냥 먹으면 쓰고 텁텁하다. 허우쿠이는 맥주 안주로 먹어도 무난할 정도다. 차로 마셔도 부드럽고 온화하다. 황산 북쪽의 타이핑이 생산지로 원숭이의 양쪽 머리처럼 생겼다.
뜨거운 물에도 잘 부서지지 않는 신기한 차여서 재미난 전설도 있다. 황산에 살던 아기 원숭이가 타이핑으로 혼자 놀러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 원숭이가 심산유곡을 헤매고 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과로로 죽었다. 이를 슬피 여긴 선량한 노인이 구릉에 고이 묻어줬다. 이듬해 차나무가 자라났다. 품질이 아주 좋았다. 원숭이의 신령이 내려준 선물이었으니 ‘원숭이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허우쿠이라 불렀다.
선비의 필수품인 문방사보야말로 휘주의 명물이다. 송나라 이후 선필(宣?), 휘묵(徽墨), 선지(宣?), 흡연(??)이라 했다. 휘주와 더불어 모두 대명사가 됐다. 유학자 주희의 정신적 고향이 휘주문화와 닿아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문방사우라고 하지만 중국은 문방사사(文房四士)라는 말을 많이 쓴다. 남송 시인 육유는 ‘수복산중객도희(水?山重客到稀), 문방사사독상의(文房四士?相依)’라 했다. 더는 갈 곳 없고 찾는 이도 드물어, 문방사사에만 의지하고 살던 시인의 절절한 마음에 등장한다. 붓, 먹, 종이, 벼루 파는 가게가 많다.
2007년에 처음 라오제에 갔을 때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길거리 훈툰(??)이었다. 기다리는 줄이 워낙 길어서 냄새만 맡았다. 왕이탸오는 당시로는 드물게 블로그를 통한 홍보로 유명해져 지역 방송에도 출연했다. 삼각 깃발에 블로그 주소를 적고 얼굴까지 새겼다. 5분이면 한 그릇 뚝딱 완성이었다. 10년 만에 갔더니 거리 중심에 번듯하게 가게를 냈다. 덕분에 맛을 보게 됐다. 여전히 즉석이라 맛이 좋다. 이제 밀가루 반죽을 직접 만지지 않아 영상으로 다시 만났다. 고성에도 있고 정감을 비롯해 휘주 마을 곳곳에 진출했다. 남달리 노력하더니 성공했다. 휘주 상인과 닮았다.
어둠이 내려도 거리는 관광객으로 법석이다. 휘주 요리를 먹으려면 패방 옆에 있는 제일루(第一?)로 가면 된다. 수십 가지의 즉석 코너가 있다. 요리 장면을 보고 고르면 된다. 주문하면 자리로 가져다준다. 짜지 않고 담백하며 불 맛도 살아있는 휘주 요리가 입에서 사르르 녹고 배도 부르다. 넷이서 채소와 고기 요리에 술과 밥까지 먹었는데 196위안(약 3만3,000원)의 영수증이 남았다. 술을 빼면 2만 원 정도다.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집도 많다. 과거와 현재가 두루 섞인 휘주의 번화가다.
당나라 세자가 휘주 상인이 된 사연
2000년에 안후이고촌락 두 곳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중 하나가 서체(西?)다. 둔계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떨어진 이현(??)에 위치한다. 셀 수 없이 많은 휘주 마을 중 인기투표에서 늘 1등 자리를 노린다. 처음에는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서쪽으로 흐르는 서계(西溪)였다. 나중에 서쪽 1.5㎞ 지점에 휘주부의 송달 업무를 담당하는 포체(??)가 설립됐다. 이름이 바뀌게 됐다. 북송 시대인 10세기 중반 호사량이 이주했고 집성촌이 됐다. 입구 호수에 혼례를 연출하는 배를 따라 들어서니 멋진 패방이 나타난다. 패방 없는 마을이 없으니 통과의례다.
명나라 만력제의 윤허로 세운 호문광(胡文光)의 패방이다. 호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고위 관리가 된 인물이다. 앞뒤로 나란히 교주자사(?州刺史)와 형번수장(?藩首相)을 새겼다. 산둥 땅 교주의 행정관인 자사(刺史)와 형주 왕부의 비서실장인 장사(長史)를 역임했다는 찬양이다. 높이 12.3m, 너비 9.95m로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어 웅장해 보인다. 학, 사슴, 호랑이, 표범과 함께 문관과 무장을 조각했다. 황제의 은총을 받은 용이 사방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 두 마리 용 바깥에 꽃을 투각한 동그란 조각들이 신기하다. 돌에 구멍을 냈는지 특별한 접착제로 붙였는지 모르나 조형미가 남다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로고가 있다. 청아한 연하늘색으로 쓴 서체촌고건축군 글씨도 시선을 끈다. 청소 도구를 들고 있는 아주머니가 아치형 문에 서 있다. 관광지인 서체는 주민들이 자율로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리는 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다. 다른 마을에 비해 저택과 사당도 정갈하게 보호하고 있다. 자연 풍광이 특별하지는 않아도 인문의 향기로 더욱더 유명하다. 입구만 봐도 장사치나 관공서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골목으로 들어서서 동선을 이끌어주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
마을 지도를 보면 뒷산에서 시작된 3개의 도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도랑 사이로 골목이 갈래짓고 있다. 대문 옆 창문을 열어 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다. 넓은 골목을 지나 좁아지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명청 시대 저택이 이어진다. 청나라 함풍제 시대 휘상인 호시호가 지은 서옥정(瑞玉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 손이 닿지 않도록 유리로 막은 목조가 있다. 130년 전 진품이다. 위쪽은 문방사보가 숨 쉬는 서가, 아래는 박쥐와 해바라기가 어울리는 모습이다.
건너편에 서옥정과 비슷한 시기에 지은 도리원(桃李?)이 있다. 휘상인 호원희의 저택이다. 서체에서 유일하게 사택(私宅)과 사숙(私塾)을 결합한 건축물이다. 학자를 초빙해 후학 양성에 힘썼는데 백거이의 칠언절구 중 영공도리만천하(令公桃李?天下)에서 작명했다. 영공은 벼슬아치의 상호 존칭어이며 도리는 문하생이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어 여름에는 그늘에서 쉬고 가을에는 열매를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부귀영화를 오래 누리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부모가 거주하던 고당(高堂)에 큼지막한 수(壽) 자가 새겨져 있고, 깨알같이 복과 수를 적었다. 복숭아를 들고 있는 아이와 노인도 그렸다. 대련은 복과 수를 동해와 남산으로 비유한 축원이다.
횡로가(?路街) 양쪽으로 서원(西園)과 동원(東園)이 나란하다. 서원은 1824년 청나라 도광제 시대에 개봉지부를 역임한 호문조가 건축했다. 동원은 그의 부친인 호상도의 저택이다. 1724년 청나라 옹정제 시대에 건축했다.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나무를 경계로 서원과 동원으로 불렀다. 서원으로 들어서면 꽃이 만발한 정원 마당에 '서체' 비석이 있다. 지명을 알려 주는 옛날 촌비(村碑)다. 문화혁명 당시 방치됐다가 서원 주인이 수습해 보관해오고 있다. 싱그러운 풀빛 색감으로 덧칠하니 정원과 잘 어울린다.
동원 대문 위에 부채 모양의 누창(漏?)이 보인다. 공기와 햇볕이 통하는 공간을 만들 때도 아무런 의미 없이 조각하지 않는다. 부채 선(扇)과 착할 선(善)은 발음이 같다. 고개를 들어 선을 실천하라는 대두행선(?頭行善)의 뜻이다. 매번 들어가거나 나갈 때 선행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장사로 돈을 버는 일은 사욕이 아닌 공익이라는 휘주 정신의 발로다. 복을 받고 장수하라는 축원인 복응상수(福膺上壽)가 걸린 방이 나온다. 양청(?廳)이라 불리는 서재다. 시계(鳴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화병(花?)과 거울(鏡子)을 놓았다. 발음을 모으면 평생을 고난 없이 평온한 종신평정(終身平靜)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양쪽 곁채로 연결되는 문이 있는데 모양이 아주 특이하다. 오른쪽은 육각형, 왼쪽은 원형으로 꾸민 문이다. 가까이 가니 독특하게 생긴 문고리가 말을 걸어온다. 나무를 겹쳐 엮어 삼각형, 사각형이 무수하게 교차하는 여닫이에 12간지 동물 조각이 반반 붙어 있다. 동물마다 옆에 풀이나 나무, 꽃이 함께 새겨져 있다. 4개의 볼록한 부정(浮釘)에 구멍을 만들고 그 사이로 자물쇠를 채웠다. 귀여운 종 두 개가 달려 문을 열면 딸랑딸랑 소리가 나겠다. 반대쪽은 나비 모양이다. 양 날개에 복과 수가 새겨져 있는데 볼수록 명품이다.
도랑 하나를 건너면 호씨종사(胡氏宗祠)가 나온다. 14세손이 살던 저택인 경애당(敬?堂)이었다가 사당이 됐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세웠고 화재로 훼손돼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중건했다. 이 시기 강남의 6대 갑부 호학재가 널리 이름을 떨쳤다. 자를 따 호관삼(胡?三)이라 불렀다. 신용을 중시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공익사업에 힘썼다. 1788년 건륭제 시대에 휘주 일대에 홍수가 발생해 침수가 극심했다. 무너진 다리들을 8년에 걸쳐 보수하고 160리에 이르는 도로를 복구했다. 사람을 중시하는 상인답게 미담도 전해진다. 다리 공사를 하는 과정에 경극의 비조로 알려진 웅촌의 조문식을 알게 됐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조문식의 재주를 알아봤다. 호관삼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문식은 과거를 통과해 호부상서를 역임했다.
인연은 대를 이었다. 조문식은 아들에게 반드시 은혜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종사 안에 반듯한 필체로 쓴 호씨 족보의 서문이 있다. 조문식의 아들 조진용이 썼다. 조진용은 가장 애지중지하던 딸을 호관삼의 아들이자 서원의 주인인 호문조에게 시집 보냈다. 한림원 학사, 태자의 태보와 군기대신을 역임한 원로였다. 서명으로 적은 직위만 세 줄이다. 고위 관료와 사돈이 된 호씨 가문은 나날이 대대손손 번창했다.
침전에 초상화와 백대증상(百代蒸嘗)이 걸렸다. 백대에 이르도록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라는 말이다. 춘추시대 좌구명이 편찬한 ‘국어(國語)’에 따르면 가을 제사는 증, 겨울 제사는 상이라 했다. 뜻이 변해 모든 제사를 통칭하며 가문의 회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3개의 신위가 나란히 놓였다. 가운데는 서체에 처음 이주한 호사량이고 왼쪽에는 호청, 오른쪽에는 호창익이다. 호창익의 작위를 따서 명경 호씨가 탄생했는데 안타까운 비사가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추모당으로 찾아간다. 입구에 이호천추일가인(李胡千秋一家人)이란 말이 적혀 있다. 이씨와 호씨, 두 성씨는 한 집안이란 이야기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재상인 위징과 이정이 협시하고 있으며 이세민을 도운 능연각 24명의 공신 초상화도 함께 걸려 있다. 당나라 마지막 황제 소종 때 반란이 일어났다. 갓 태어난 세자는 유모 덕분에 도피했고 시랑이던 호청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황제의 운명이란 없었다. 호창익으로 이름을 바꾼 채 숨어 살았다.
서체 골목을 돌아다닌다. 도랑 물줄기를 따라 조성된 마을이다. 안과 밖이 통하도록 구멍을 뚫은 창문이 많다. 낙엽 모양으로 예쁘게 만든 담장이 보인다. 휘상의 진지한 유머다.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인생관이기도 하다. 낙엽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이다. 당나라의 마지막 혈육이 이역만리 떨어져 살던 가문이다. 정치를 하거나 반란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저 상인의 마음으로 부를 축적하고 공동체를 위해 나눔을 실천했다. 낙엽이 뿌리를 튼튼하게 한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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