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36세에 당대표, JP는 37세에 당의장?
경선 거쳐 1인자 직함 단 건 이준석이 최초
정당사의 한 획 그은 JP…軍 주도 창당은 한계
"1963년 당시 37세였던 김종필이 민주공화당 당의장이 된 이래로 30대가 주요 정당의 대표인 건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준석(36) 국민의힘 대표가 한 살 어리군요."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앞서 11일 국민의힘 신임 당대표에 이 대표가 선출되자 페이스북에 장문의 축하 글을 남겼습니다. 30대 청년이 거대정당을 이끌게 돼 우리나라 정치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표의 상징이 된 '헌정사 첫 번째 30대 당대표'는 앞서 1960년대에 있었다고 언급한 건데요. 이를 두고 일부에선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원조란 주장이 나왔죠.
이준석, 명실상부한 당 1인자…JP, 1인자 같았던 2인자
이준석과 김종필, 과연 누가 헌정사 첫 번째 청년 당대표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대표와 김 전 총리 둘 다 맞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건데요. '당대표'란 직함을 단 30대 정치인은 이 대표가 최초가 맞습니다. 하지만 당 실세, 실질적인 책임자로 보면 김 전 총리가 최초가 됩니다.
1960년대 정당사를 보면 김 전 총리는 당시 국민의힘의 뿌리인 민주공화당의 2인자였습니다. 김 전 총리는 1963년 12월 당의장에 취임합니다. 당의장은 지금의 원내대표로 볼 수 있는데, 그때 김 전 총리 나이가 37세였습니다. 이 대표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 당 리더가 된 겁니다.
당시 당대표 자격인 '당총재'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당총재는 대통령이 맡았기에 실제 당을 운영하는 책임자는 김 전 총리로 볼 수 있습니다. 김 전 총리는 1979년 11월에 당총재에 오릅니다. 드디어 1인자의 직함을 달게 됐지만, 그땐 이미 50대였죠.
JP,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 맡아 창당 이끌어
김 전 총리에게 최초 30대 당대표란 타이틀을 붙이기 모호하더라도, 30대에 한국 정치의 새 역사를 쓴 건 분명합니다. 김 전 총리가 기능과 형식을 제대로 갖춘 우리나라의 첫 번째 정당인 공화당 창당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5개월 뒤인 그해 10월 신당 창당 계획을 세웁니다. 신진세력을 키울 정당이 필요하다고 봤고, 일본의 정당 모델에 매력을 느껴 우리나라에도 도입해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하지만 김 전 총리의 정당 창당 작업은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김 전 총리는 2015년 한 언론에 기고한 회고록에 "이 일이 혁명 과업의 일환이라고 믿었다. 어떤 욕을 먹더라도 가겠다"며 "나중에 공화당을 불법 조작했다고 비난받았지만, 그때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고 회상했죠.
JP, 반대 세력 반발로 외유 마친 뒤에야 당의장 돼
김 전 총리는 1963년 1월 창당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장에서 물러납니다. 김 전 총리는 이때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공화당 탄생을 진두지휘했죠.
그러나 김 전 총리의 장악력이 세지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창당준비위 내 반(反)김종필 세력이 생겼고, 국가재건최고회의(5·16 쿠데타 이후 정권 이양까지 국가를 통치한 최고 의결 기관)에서도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죠.
당시 김 전 총리를 겨냥한 '4대 의혹 사건'도 불거졌는데요. 초대 중정부장이었던 김 전 총리가 ①워커힐 호텔 ②증권 파동 ③새나라자동차 ④파친코 사태에 개입해 거액의 돈을 챙겼다는 의혹이었죠. 사태가 군 세력 내 갈등으로 번지자 김 전 총리는 창당을 하루 앞둔 1963년 2월 25일 창준위원장에서 물러나 외유를 떠납니다.
그는 정치 인생 내내 반JP 세력의 압박으로 외유를 자주 떠났는데요. '왜 한국을 떠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답해 화제가 됐죠.
공화당은 김 전 총리가 자리를 비운 2월 26일 공식 출범했고, 김 전 총리는 갈등이 수습된 뒤인 그해 10월 한국에 돌아옵니다. 두 달 뒤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명을 받아 당의장에 취임합니다.
1963년, JP와 함께 30대 정치인 대거 국회에 입성
김 전 총리는 무늬만 2인자였지 사실상 1인자에 가까웠습니다. 한국일보 1964년 1월 1일 자에 '시련의 해를 내다보는 삼당 실력자의 흉중'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요. 공화당에선 김 전 총리가 당의장 자격으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김 전 총리를 비롯해 30대가 정치권에서 약진한 시대입니다.
공화당이 창당한 해에 제6대 국회의원 총선거(11월 26일)가 치러졌는데 김 전 총리와 함께 20·30대가 대거 국회로 들어옵니다. 총선 이틀 뒤인 28일 자 한국일보를 보면 이날 기준으로 당선이 확정된 125명(6대 국회의원 정수 189명) 중 20·30대는 28명으로, 22%를 차지했죠.
하지만 김 전 총리와 이 대표를 단순히 비교하는 건 어렵습니다. 1960년대는 군사정권 시절로 쿠데타 인사가 모든 권력을 잡은 때입니다.
반면 이 대표는 당내 경선을 통해 유력 정치인들을 누르고 당선됐죠. 당원의 마음을 움직여 투표로 결정된 만큼, 정치적 함의 또한 김 전 총리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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