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작년 이맘때만 해도 코로나19가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매해 가던 와이너리 여행을 단념한 지 벌써 1년 반이 훌쩍 지났다. 와인 모임마저 하나둘 취소돼 어느새 ‘혼술’에 익숙해졌다.
와인창문협회, 거리 두기 판매의 시초
그러던 참에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재미있는 소식이 들렸다. 중세 때 일이란다. 흑사병이 창궐하자 와인 상인들이 ‘작은 창’을 통해 와인을 팔았다. 와인잔만 건넬 수 있는 작은 창은 접촉을 최소화하면서도 장사할 수 있게 하는 통로였다. 이 풍경이 코로나19 탓에 다시 재현됐다는 소식이었다.
영상을 보니 ‘와인 창문’은 작은 액자 크기였다. 와인을 팔던 이 창을 통해 피렌체 사람들은 커피나 젤라토 등을 팔고 있었다. 무척 흥미로워 검색해보니, 와인창문협회(Associazione Buchette del Vino)도 있었다.
협회는 피렌체 토박이 몇몇이 의기투합해 2015년 10월에 결성했다. 이들은 와인 창문이 피렌체의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이나 예술 작품 못지않음을 자부했다. 시민 제보로 곳곳에 숨겨진 와인 창문을 발굴해 보존하자는 사업을 펼쳤다. 와인 창문을 찾아 등록하고 지도를 만드는 등 정보도 공유했다. 지금까지 토스카나주에서 와인 창문이 300여 개 발견됐는데, 150여 개가 피렌체에 있단다.
‘새 부리 가면을 쓴 의사와 이발소 의사’라는 책에는, 당시엔 의사들이 새 부리 가면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흑사병 환자들을 매질했다고 한다. 비과학적이지만 당시의 치료법이었다. 그런 시대에 와인 창문을 통해 과학적으로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장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중세 와인창으로 판 와인은?
그런데, 당시 피렌체 상인들은 그 작은 창으로 무슨 와인을 팔았을까. 필자는 베르나차 품종으로 빚은 와인이라 추측한다. 베르나차 품종으로 빚은 와인이 14세기의 작품에 등장한다.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피렌체 출신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베르나차가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이보다 앞선 13세기 말, 시에나 출신 시인 체코 안졸리에리도 작품에 베르나차를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그리스 와인과 베르나차로 빚은 와인이 좋아.”
토스카나주에는 베르나차로 유명한 와인 산지가 있다. 높은 탑이 빼곡하게 세워져 ‘중세의 맨해튼’이라 부르는 산 지미냐노 마을이다. 원산지 명칭으로는 베르나차 디 산 지미냐노 DOCG이다. 그런데 베르나차는 화이트 와인이다.
그럼 레드 와인은 무엇이었을까. 지역과 시대를 보건대, 피렌체 남쪽에서 시에나 북쪽에 이르는 구릉 지대에서 만든 와인이었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키안티 클라시코’다.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3,000여 년 전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포도 농사를 지었다. ‘키안티’는 8세기부터 그 지명이 문헌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됐다. 1398년 문서에는 키안티에서 생산한 화이트 와인이, 15세기 문서에는 레드 와인 산지로서의 키안티가 기록돼 있다. 교황들도 키안티에서 생산한 와인을 즐겼단다.
아직 ‘토스카나 와인’으로 통칭해 불리던 키안티 와인의 명성이 계속 이어지자 이탈리아반도의 다른 도시국가들에서도 유사 와인이나 가짜 와인을 만들어 유통했다. 심지어 그런 와인을 바다 건너 영국으로 수출까지 했다.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1731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메디치(메디치가의 코시모 3세)는 피렌체 남부에서 시에나 북부에 이르는 구릉지대에 구역을 지정하고 ‘키안티’라 칭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와인만을 키안티라 부를 수 있도록 칙령을 발포한 것이다. 그해 7월에는 와인 생산과 배송, 사기 단속과 판매 감시 활동에 대한 규정도 만들었다.
이는 원산지 보호 제도가 토스카나 공국에서 세계 최초로 시행된 ‘사건’인 셈이다. 이때 정한 키안티 구역의 경계는 200년 뒤 키안티 클라시코 규정을 만들 때 근거가 됐다. 게다가 ‘이탈리아 와인법’을 제정할 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코시모 3세가 사망한 뒤 토스카나 공국은 얼마 안 있어 사실상 오스트리아 속국이 되었다가 프랑스제국에 편입되었고 다시 오스트리아 왕족의 지배를 받는 등 수난을 겪었다. 상전벽해의 상황에서 ‘키안티 칙령’이 제대로 지켜졌을까 싶다.
몰락한 키안티 와인의 부활
1700년대 후반부터 점점 몰락해 가던 키안티 와인을 1세기 만에 부활시킨 인물이 있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베티노 리카솔리 남작이다. 그는 키안티 와인의 블렌딩 레시피를 만들어 와인 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켰다. 그의 가문은 1141년부터 키안티의 ‘브롤리오’ 영지에서 와인을 만들었다. ‘바론 리카솔리’라는 와이너리가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다.
한편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포도나무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필록세라도 잠잠해지자 키안티 와인의 국내외 수요가 급격히 치솟았다. 애초 지정한 ‘키안티 구역’ 주변에 포도밭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키안티 구역 밖에서 생산한 와인도 키안티 와인으로 팔렸다.
마침내 1924년 ‘원조’ 키안티 와인 생산자들이 협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검은 수탉을 ‘진짜’ 키안티 와인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 상징은 16세기 중반, 화가 조르조 바사리가 그린 ‘알레고리 오브 키안티(Allegory of Chianti)’에 그려진 검은 수탉에서 차용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검은 수탉의 와인 키안티 클라시코’ 칼럼을 참고하시라.
1932년에는 키안티(Chianti)에 ‘원조’를 뜻하는 ‘클라시코(Classico)’를 붙여 ‘키안티 클라시코’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를테면 ‘원조 키안티’는 ‘키안티 스타일 와인’과 다름을 명칭으로 구분하여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키안티 스타일의 와인은 그냥 ‘키안티’로 칭했다.
협회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1967년 DOC를 획득하고 1984년 DOCG로 승격됐지만, 법적으로는 1996년에 와서야 키안티 클라시코 DOCG와 키안티 DOCG가 분리되었다.
참고로 이탈리아 와인은 VDT(Vino da Tavola)-IGT-DOC-DOCG 4개의 등급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DOC는 원산지 통제 규정에 따라 만든 와인에 붙고, DOCG는 DOC 가운데 이탈리아 정부가 보증하는 고급 와인에 붙는다. DOCG 와인은 병목에 인증 마크를 부착한다.
알코올 함량 높은 키안티 클라시코, 높은 포도 수확량 키안티
그래서인지 키안티 클라시코와 키안티가 ‘등급만 다른 같은 와인’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역사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원산지는 물론이고 등급 체계, 와인 생산 규정 등이 완전히 다르다. 말이 나온 김에 뭐가 다른지 톺아보자.
먼저, 원산지 명칭. 지도를 보면 가운데 색이 짙은 부분이 키안티 클라시코 DOCG이고, 주변 연한 부분이 키안티 DOCG이다. 지역이 완전히 다르다.
둘째, 등급 체계. 키안티 클라시코는 아나타, 리제르바, 그란셀레치오네 순으로, 키안티는 일반급, 수페리오레, 리제르바 순으로 등급이 높다. ‘키안티 클라시코 그란셀레치오네’는 와이너리가 소유한 단일 포도밭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 2012년산부터 생산되었다.
셋째, 숙성 기준. 키안티 클라시코는 등급에 따라 12개월, 24개월(병 숙성 3개월 포함), 30개월(병 숙성 3개월 포함) 이상, 키안티는 6개월, 12개월, 24개월 이상 숙성해야 한다. 이는 최소 규정이기 때문에 와이너리에 따라 더 오래 숙성하기도 한다.
넷째, 포도밭 면적과 포도나무 그루당 수확량. 키안티 클라시코는 헥타르당 7.5톤, 그루당 2킬로그램이 넘으면 안 된다. 키안티는 헥타르당 9톤, 그루당 3킬로그램까지만 수확해야 한다. 수확량을 조절하면 포도의 당도, 타닌, 산도뿐만 아니라 미네랄 등 기타 성분의 응축도가 달라진다. 와인의 풍미와 알코올 함량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섯째, 최소 알코올 기준. 키안티 클라시코는 등급에 따라 알코올 함량이 12%, 12.5%, 13% 이상이어야 한다. 키안티는 11.5%, 12%, 12% 이상이다.
여섯째, 포도 품종과 블렌딩 비율. 키안티 클라시코는 산지오베제를 80% 이상 사용해야 한다. 허용된 토종 품종(카나이올로와 콜로리노)과 국제 품종(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시라)을 20% 이내로 섞을 수 있다. 화이트 품종은 사용할 수 없다. 키안티는 산지오베제를 70% 이상 사용해야 하며, 허용 품종을 30%까지 섞을 수 있다. 화이트 품종도 10% 이내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규정을 바탕으로 생산자에 따라 주 품종인 산지오베제에 카나이올로, 콜로리노 품종으로 와인의 구조와 색을 보완한다. 국제 품종이나 청포도의 장점을 살려 품종 비율도 조절한다. 테루아르의 특성과 생산자의 개성이 반영된 다양한 와인이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요즘은 ‘키안티 클라시코’든 ‘키안티’든 100% 산지오베제를 사용하는 곳도 많다.
핏빛 닮은 루비색, 주피터의 피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키안티 클라시코와 키안티 와인의 핵심 품종으로 그 이름부터 남다르다. ‘주피터의 피(Sangue di Giove)’라는 뜻이다. 이 품종은 워낙 클론(변종)도 많고 광범위하게 재배되어 그 특징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핏빛을 닮은 영롱한 루비색을 띠며 검붉은 베리와 꽃향기에 찻잎과 허브향이 어우러졌다. 미디엄 보디에 촘촘한 타닌과 발랄한 산도 덕분에 잘 만든 와인은 구조감과 밸런스가 좋다. 이미지로만 본다면 우락부락한 주피터보다는 매끈한 근육질의 청년 바쿠스와 비슷하다. 숙성할수록 흙, 버섯, 낙엽, 감초, 커피, 가죽 등 다양한 향이 더해진다.
이를 보면, 키안티 클라시코와 키안티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단순히 키안티 클라시코가 키안티보다 고급이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상대적으로 키안티가 더 대중적이긴 하지만 키안티의 7개 서브존(Rufina, Montespertoli, Montalbano, Colli Senesi, Colline Pisane, Colli Fiorentini, Colli Arentini) 중 루피나나 콜리 세네시에서 생산한 와인은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키안티 클라시코’든 ‘키안티’든, 피렌체의 작은 창 너머에서 건네진 와인을 받아 마시고 싶다. 와인과 찰떡궁합인 피자나 파스타 또는 그 유명한 피렌체식 티본 스테이크와 함께 말이다.
어쩌면 피렌체의 작은 창은 와인이 아니라 온기를 주고받은 최소한의 통로이지 않았을까. 괜스레 사무실 작은 창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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