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소속 첩보부대… 부대원 20%가 여성
피란민 가장 첩보·미군기 폭격 유도 등 활약
군번 없는 비정규군이라 전후 보상 뒤늦게
"엄마가 첩보원이었다는 사실을 서른 중반이 돼서야 알았어요. 외할머니는 모른 채 돌아가셨고요."
6·25전쟁 71주년을 앞두고 23일 경기도 남양주시 자택에서 만난 심용해(86)씨의 장녀 김은희(65)씨는 엄마가 환갑이 넘고서야 미군 소속의 비정규 한국인 첩보부대 '켈로(KLO)부대'에서 복무하면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병원에서 우연히 엄마의 전우를 만난 덕이었다. 켈로부대에서 '비밀을 지키라'고 교육받았던 심씨는 주변에 여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고만 했을 뿐 첩보원이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살았다. 세상도 뒤늦게 여성 켈로부대원을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심씨는 최근 건강이 급속히 악화돼 대화가 어려운 상태로 병상에 있다.
15세 소녀, 낙하산 타고 적진 침투
켈로부대는 미국 극동사령부가 1949년 북한 출신 중심의 자생적 유격부대를 흡수해 만든 부대다. 미군이 그해 한국 주둔 전투병력을 철수하면서 북한 지역 첩보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위해 창설했으며, 부대 명칭은 미 극동사령부 직할 한국연락사무소(KLO·Korea Liaison Office)의 영문 머리글자를 땄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켈로부대는 적진 내 첩보와 후방 교란을 맡아 맹활약했다. 1951년 7월 창설된 미군 8240부대에 통합됐지만, 비정규군이라 계급도 군번도 없었다.
전쟁 당시 켈로부대원은 피란민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하는 방식의 첩보 활동을 자주 펼쳤다. 이 과정에서 여성 부대원들은 "여성은 그런 위험한 작전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십분 활용했다.
열다섯 살 심용해씨가 맡았던 임무는 북한군 진영에서 병력 규모, 화기 배치 등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심씨는 지도를 보고 지형을 모두 외운 후 걷거나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들어섰다. 보름간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도 하고, 인적 드문 캄캄한 산속 무덤에 기대 잠을 자기도 했다. 심씨가 얻은 정보는 미군과 국군이 전진 여부를 결정하거나 폭격 위치를 정할 때 중요한 자료로 쓰였다.
적진 한복판이었지만 어린 소녀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수상히 여기는 사람에겐 "잃어버린 오빠를 찾으러 다닌다"고 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에 붙들려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재판을 받다가 폭격기가 지나가자 사람들이 방공호로 대피하는 틈을 타 도망쳐 살아났다.
미군 "여성 요원 첩보 정확" 증원 요청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켈로부대엔 여성 요원이 늘어났다. 이들이 가져오는 정보가 정확하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자, 미군 측이 여성 첩보원을 늘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김상기(88) KLO·8240부대전우회 총연합회장은 "처음엔 부대 내 여성 비율이 10% 정도였는데 나중엔 20% 정도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북한군 우위였던 초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도 여성 켈로부대원들이 활약했다.
켈로부대 남성 부대원들도 여성 용사들의 활약을 증언했다. 23일 경기 광명시 자택에서 만난 박충암(91)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회장은 당시 자신이 소속된 켈로부대에 10여 명의 여성 부대원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 공군기와 교신하며 폭격 지점을 알려주는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 통신병들이 있었다. 맨몸으로 무전기 하나 들고 미사일 투하 지점에 가서 '앞' '뒤' 등 짧은 영어로 정확한 폭격을 유도했다.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박 회장은 적군의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서 오열하던 열일곱 살 위생병 이명숙씨도 기억한다고 했다. "여기서 죽으려고 그러냐"고 팔을 잡아채자 이씨는 "살점이라도 묻어줘야 하지 않겠냐"며 떨리는 손에 든 젓가락으로 전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전쟁 트라우마 안고 아내로 엄마로
여성 켈로부대원은 전쟁이 끝난 뒤 아내로서 엄마로서 일상을 살아냈다. 심씨의 딸 김씨는 "상이군인인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면서 "유독 엄격하신 것 외에는 보통 엄마였다"고 말했다.
김씨는 엄마가 첩보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나서 정신과에 모시고 갔다. 오랜 시간 묻어뒀을 마음의 상처가 짐작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시체 더미 속에서 생존했으니 트라우마가 왜 없겠나 싶어서 병원 방문을 권했는데, 늘 '정신력'을 강조하셨던 엄마가 의외로 흔쾌히 응했다"며 "이후 정신과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 시간을 기다리셨다"고 말했다.
심씨는 지난해 6·25 참전 여군의 경험을 들려주는 방송에 출연한 뒤 뇌출혈로 쓰러져 1년째 투병 중이다. 김씨는 "지금은 엄마가 말씀도 잘 못하신다"며 "건강하실 때 말씀을 많이 들어뒀으면 좋았을 걸 후회한다"고 했다.
71년 만에 보상 길 열렸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전장에서 헌신했지만, 켈로부대원은 군번 없는 비정규군에다가 외국군 소속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3만2,000명으로 추산되는 켈로부대원 중 전우회가 확보한 명단은 500여 명 수준이고, 일부는 이미 고인이 됐다. 심씨가 그렇듯이, 생존자들도 하나둘 거동이나 대화를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
한참 늦었지만 6·25전쟁 발발 71년이 지난 올해 이들에 대한 보상책이 마련됐다.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6·25전쟁 참전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3월 국회를 통과해 4월 공포된 것이다. 6·25 참전 비정규군도 정규군처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고, 비정규군공로자심의위원회를 통해 공로자 및 유족에게 공로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공로금 액수는 10월 시행령에서 최종 확정되지만, 국방부에 따르면 켈로부대원 1인당 1000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는 수준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당시 부대원들이 실제 보상받는 일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스스로 부대원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절차를 밟아야 해서다. 박충암 회장은 "살아있는 부대원도 대부분 90대일 만큼 시간이 오래 지난 데다, 당시 첩보부대라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증빙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입법예고된 관련법 대통령령에는 증빙자료 예시로 근무 당시 사진, 비정규군 신분증, 명령지 등을 들고 있다.
국방부는 10월 14일부터 보상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심의를 거쳐 보상 가부가 결정될 것"이라면서 "신청 시 증빙자료를 첨부하게 돼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증빙하게 할지는 논의 단계"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전우회에서도 최대한 증빙을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며 "최소한의 명예회복인 보상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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