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호스’ 후보, 구원투수 가능성 있지만
비전, 철학 제공해야 진정한 다크 호스
외부 후보군에 철학과 가치 검증해야
‘다크 호스’라는 용어는 경마에서 우승권 밖에 있던 경주마가 뜻밖에 두각을 나타내서 승리하는 경우에서 유래했다. 선거에선 예상외 인물이 선전해서 후보가 되고 또 당선되면 그가 다크 호스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는 선거를 앞두고 기존 후보들이 변변치 못해서 고전(苦戰)하는 정당에 뒤늦게 뛰어든 후보가 대안으로 선택되어 본 선거에 임하는 경우를 엄격한 의미에서 다크 호스라고 부른다.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웬델 윌키(1892~1944)가 그런 경우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기대와는 달리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실패하자 1938년 중간선거에 유권자들은 공화당에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 해 하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81석을 추가해 169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원 선거 유권자 총투표에서도 공화당은 민주당을 불과 1.2%로 바짝 추격했다. 6년 만에 공화당이 다시 활력을 찾은 것이다.
194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내에선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 그리고 토머스 듀이 뉴욕 지검장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통적인 고립주의자들이었다. 히틀러가 폴란드 등을 침략, 유럽이 전쟁에 휩싸인 상황에서 미국은 해외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면서 영국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인 출신인 웬델 윌키가 갑자기 대통령감으로 부상했다.
기업 변호사와 전력회사 임원을 지낸 윌키는 원래 민주당원이었다. 그는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같이 정부가 민간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 널리 알려졌다. 윌키는 루스벨트의 반기업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개인의 기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무역을 주창했으며, 전체주의 국가의 침략전쟁에 반대했다. 이처럼 윌키는 루스벨트의 경제정책에 반대하면서도 대외정책에 대해선 기존의 공화당 정치인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윌키는 1939년 말에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윌키는 공화당 대선 후보군 중에선 어느 누구도 후보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고 프라이머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공화당 전당대회는 교착상태에 빠져들었고, 대의원들은 공직 경험은 없지만 다크 호스로 떠오른 윌키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윌키의 지지도는 한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바짝 추격했으나 전쟁을 앞둔 미국민은 루스벨트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았다. 다크 호스로 대선에 뛰어든 윌키는 패배했으나 득표율에서 루스벨트와의 차이를 10% 내로 좁히는 데 성공해 대통령 선거에 연패한 공화당에 희망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윌키는 고립주의에 빠져 있던 공화당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윌키는 정당 내부에 적절한 대통령 후보가 없는 경우에 구원투수로 뒤늦게 뛰어든 다크 호스가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윌키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며, 그 시점에서 공화당에 필요한 비전과 철학을 제공한 '준비된' 후보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은 이런저런 외부 인사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1940년의 윌키처럼 경제는 물론이고 대외정책에서도 자신만의 철학과 가치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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