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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24km 걷는 택배원… 아프지 말라고 병원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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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24km 걷는 택배원… 아프지 말라고 병원이 나섰다

입력
2021.06.28 04:30
수정
2021.06.28 09:2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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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1970년대 산업화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의 아픔을 그린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시대의 일을 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어요. 최근 저희 병원을 찾았던 한 택배원은 하루 평균 24㎞를 걸어요. 그러면서 무거운 짐을 차에 싣고 내리고요. 이런 분들은 어깨나 하지, 무릎 근육에 이상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적인 장거리 달리기 선수한테 생기는 병이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병들도 막을 수 있는 병이라는 거예요.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장

먹고살려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프기 마련이다. 많이 쓰면 고장나는 것이 당연하다. '한 직업에 오래 종사함으로써 그 직업의 특수한 조건에 의하여 생기는 병’이라는 직업병의 말뜻에 그러한 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직업병을 연구해온 의사의 생각은 그러한 통념과 다르다.

직업병도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노동자를 괴롭히는 ‘특수한 조건’을 찾아내고 바꾸는 것을 통해서다. 몸을 일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터를 몸에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다. 녹색병원 부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이달 출판한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에는 일터를 몸에 맞추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는 윤간우 과장을 21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만났다.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장이 21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최근 직업병의 발생 동향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장이 21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최근 직업병의 발생 동향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잘못 만들어진 일터가 직업병 일으켜

노동자를 배려하지 않는 일터, 잘못 설계된 작업환경은 직업병과 산업재해를 일으킨다. 윤 과장은 농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농기계 전복 사고를 예로 들었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농기계는 갈수록 커지는 반면 농도의 폭을 규정한 기준은 1960년대에 머물러 있다. 윤 과장은 “기준이 당시 카탈로그에 실린 농기계들의 평균 폭을 고려해서 만들어졌다”면서 “농업인이 잘못해서 사고가 난다고들 생각하지만 좁은 길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업병을 줄이려면 노동자를 병들게 만드는 원인부터 찾아야 한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1999년부터 그런 작업을 해왔다. 노동조합의 요청을 받아 역학조사를 펼치거나 정부의 연구과제를 수행하기도 한다. 지역사회나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작업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해법을 제안하는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윤 과장은 “예전에는 ‘지적질’을 주로 했는데 최근에는 해결책까지 주려고 노력한다”면서 웃었다.

택배원 환자 10년 사이 크게 늘어

예컨대 연구소의 인간공학팀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레를 연구하고 있다. 택배원 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윤 과장은 근골격계 직업병 환자가 100명이라면 이 가운데 택배원 환자는 10년 사이에 1명에서 20명으로 늘어난 것 같다고 평가했다. 농수산물을 나르면서 매일 2톤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환자도 있었다. 윤 과장은 “마트 노동자들의 경우 운반 상자에 구멍만 뚫어도 부담이 확 줄어든다”면서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공학팀은 폐지 수거용 운반도구도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들이 유모차를 끌기 힘든 보도블록을 피해서 도로로 나왔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녹색병원, 산재환자에 500만원 지원

녹색병원은 직업환경의학과과 노동환경건강연구소를 개설해 직업병을 진료하고 연구하는 몇 안 되는 병원이다. 이러한 병원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는 질문에 윤 과장은 "아무래도 수익이 나기 어려우니까 주변에서 보기 쉬운 모습은 아니다"라면서 "저희도 이런 저런 연구를 수행하고 또 진폐증 환자나 근골격계 환자를 진료하면서 병원 수익에도 기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녹색병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의 혜택을 받도록 환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산업재해 인정을 받지 못한 환자들에게는 일정한 기준을 둬서 1인당 최대 500만원까지 치료비를 지원한다. 재원은 시민사회나 기업, 노동조합 등에 기대고 있다.

최근엔 정신질환 산업재해 급증

윤 과장은 최근 급증한 직업병 가운데 하나로 정신질환을 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산업재해 신청도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정신질환의 산업재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체계화되면서 산업재해로 인정되는 경우도 늘었다. 윤 과장은 "일본에서는 정신잘환으로 인한 산업재해가 10여년 전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한국에서도 지금 확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직업병을 예방하려면 결국 안전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 윤 과장은 국내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공정을 개선하고 질병을 조기에 치료하면서 근골격계 질환 환자가 줄었다는 이야기다. “막을 수 없는 병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막을 수 있는 병이어서 더 열심히 합니다. 앞으로는 소규모 사업장이나 일용직, 신규 업종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더 필요할 겁니다."

■ 녹색병원은?

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사건'을 계기로 설립된 민간형 공익병원이다. '원진레이온'은 인조섬유인 레이온을 제조하던 기업으로 노후한 설비를 개선하지 않아서 많은 노동자가 유해물질에 중독됐다. 수백명의 노동자들가 작업 과정에서 사용된 이황화탄소에 중독돼 정신이상 증상부터 뇌경색, 다발성신경염 등 중풍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들이 시민사회와 손잡고 투쟁한 끝에 정부는 원진레이온에서 직업병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사고 수습 과정에서 산업재해 피해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연구하는 병원과 연구소의 건립이 추진됐다. 그 결과로 녹색병원이 경기도 구리시에 1999년 문을 열었다. 인터뷰가 이뤄진 서울시 중랑구의 녹색병원은 2003년 개원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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