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맞아 다시 보는 전쟁 영화 '고지전'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라이언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가 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해라. 우리 손으로 피를 묻히는 순간이 더 많아질수록, 집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는 사실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속 존 밀러 대위의 대사
지난 25일은 6ㆍ25 전쟁 71주년이었습니다. 1950년 그날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 가까이 이어지며 군인만도 84만명 가량이 전사했습니다.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아 24만여명이 숨졌습니다. 국군과 UN군 등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는 6ㆍ25전쟁을 국내 스크린에 펼쳐낼 때 금기가 있었습니다. 인민군을 인간적으로 묘사해서는 안 됐고, 국군의 부정적인 모습을 담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요절한 천재로 불리곤 하는 이만희(1931~1975ㆍ유명 배우 이혜영의 아버지입니다) 감독이 금기를 어겼다가 고초를 겪은 대표적인 영화인입니다. 그는 전쟁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를 만들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중공군에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한 국군 여포로를 인민군이 구해주는 장면을 영화에 담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인민군이 동포애와 인간애를 발휘하는 모습만으로도 공산주의 미화에 해당한다고 당국은 판단했던 거죠.
①영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다
이만희 감독은 여러 수작들을 만들어냈는데, 그 중 전쟁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바로 보기)은 대표작입니다. 국군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영화입니다. 실제 폭약을 사용해 만들어 낸 전투 장면은 박진감이 넘칩니다. 60년 가까이 된 영화지만 지금 봐도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와 더불어 표현의 자유 폭이 넓어지면서 전향적인 시각으로 6ㆍ25전쟁을 바라보는 영화들이 등장했습니다. 지리산 빨치산을 스크린 중심에 둔 ‘남부군’(1990)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화였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바로 보기)는 막대한 물량을 동원해 전투 장면을 세밀히 묘사하며 넓은 시각으로 동란의 비극을 포착해냈습니다.
②평범한 병사들 시선으로 본 전쟁
오늘 상세히 소개해 드릴 ‘고지전’(2011)은 진일보한 6ㆍ25전쟁 영화입니다. 사선에서 적과 맞서 싸워야 했던 사람들이 겪는 전쟁의 고통을 그렸습니다. 인민군을 악으로 몰아세우지도 않고, 국군의 활약상을 부각시키지도 않습니다. 정작 전쟁의 목표를 잊어버린 채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평범한 병사들의 시선으로 전쟁의 실재에 접근하려고 합니다.
‘고지전’은 6ㆍ25전쟁 막바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첩대 장교 강은표(신하균) 중위는 휴전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남과 북이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는 애록고지에서 국군 악어중대의 중대장이 아군 총알에 맞아 숨졌는데 사고 경위가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적과 내통한 듯한 서신이 발견되기도 해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은표는 애록고지 인근에 주둔한 악어중대에서 조사를 시작합니다. 수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임시 중대장은 이제 스무 살인 신일영(이제훈)이 맡고 있습니다. 인민군에 끌려가 죽은 줄 알았던 고향 친구 김수혁(고수) 중위를 만나 반갑기는 한데 그 역시 의문투성이입니다. 2년 전 이등병에 불과했던 수혁은 고속 진급으로 중위가 됐는데, 악어중대의 실질적 리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대원들은 비극적 사건을 겪고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데 말을 아낍니다.
③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쟁의 목표입니다. 누군가는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전쟁에 임합니다. 북한이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요. 인민군 장교 현정윤(류승룡)은 전쟁 초기 의정부에서 포로로 잡힌 은표와 수혁에게 자문자답하며 북한의 인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너희들이 와 전쟁에서 지는지 아나? 와 도망만 치는 지는 아나? 기건 와 싸우는지 모르니까. 이 전쟁 일주일이면 끝난다.”
현정윤의 말처럼 당시 많은 국군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당시 남한 정부의 문제점을 은표를 통해 드러냅니다. 은표는 징계의 일환으로 동부전선으로 파견돼 악어중대를 조사합니다. 그는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부역자들을 엄밀히 색출해 제거해야 한다는 상관의 말에 “친일파도 그렇게 청산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대꾸했다가 징계를 받게 됐습니다. 은표의 사연은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이고 명확한 국가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던 당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드러냅니다.
개인에게도 전쟁의 목표는 각기 다릅니다. 병사들은 지옥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어느 장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전쟁에 뛰어듭니다. 악어중대의 신임 중대장 유재호(조진웅)는 은표와 전선으로 향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 야망 있는 거지? 그렇지? 전쟁이 끝나면 전선에서 싸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서 평가가 달라질 거야.” 유재호는 중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작전을 수행했다가 애먼 사상자를 내고 맙니다.
북한의 호언과 달리 전쟁은 장기전이 됐습니다. 영화 속 국군과 인민군은 지도 위에선 5센티미터, 실제로는 500미터 정도 땅을 확보하기 위해 애록고지 쟁탈전을 벌입니다. 다른 전선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휴전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소모전을 펼쳤습니다. 17세 신병 남성식(이다윗)은 “전선이 교착되고 깨작깨작하다 2년 동안 죽은 사람만 50만명”이라고 말합니다. 별다른 의미 없는 장기판의 말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말입니다. 확신에 가득찼던 인민군 현정윤마저 고지전에 지쳐 이런 말을 합니다. "(싸우는 이유를) 내래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너무 오래 돼서 잊어버렸어."
④전쟁 중에도 놓쳐서는 안 될 끈
애록고지는 실재하지 않은 공간입니다. 영화 제작진은 6ㆍ25전쟁의 대표적인 격전지인 백마고지를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은표가 동부전선에 도착했을 때 애록고지 표지판이 화면에 잡힙니다. 영문으로는 ‘AEROK’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저 영문을 거꾸로 읽으면 ‘코리아’가 됩니다. 애록고지는 당시 한반도의 축소판이라는 은유가 담겨 있습니다.
애록고지는 국군과 인민군이 사투를 벌이는 곳인 한편 우정을 나누는 곳이기도 합니다. 수혁을 비롯해 악어중대 부대원들은 애록고지 한 참호에서 인민군과 간접적으로 교류를 합니다. 처음에는 악어중대 부대원들이 애록고지를 다시 탈환했을 때 사용하기 위한 물건을 묻어뒀던 곳인데 인민군과 메모와 술, 음식을 교환하는 아지트로 변모합니다. 국군과 인민군은 철천지원수로 싸우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 평화지대를 자연스레 만들었습니다.
‘고지전’의 시나리오는 박상현 작가가 썼습니다. 박 작가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원작소설 ‘DMZ’를 쓰기도 했습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면서도 조심스레 우정을 나눈다는 설정이 닮았습니다.
애록고지의 아지트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화 속 남북한 군인들은 전쟁 중에도 교류라는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북한과 대립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자세를 이어가야 한다고 영화는 주장합니다. 그래야만 6ㆍ25전쟁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영화는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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