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염전노예 피해자, '부실재판' 책임 물었지만 법원은 끝내 외면했다
알림

염전노예 피해자, '부실재판' 책임 물었지만 법원은 끝내 외면했다

입력
2021.06.28 13:30
수정
2021.06.28 15:39
0 0

지적장애인 처벌불원 검증 없이 효력 인정?
판사 책임 묻는 손배소송 1·2·3심 전부 기각
손배 재판부 "시간 탓 검증 한계" 대신 해명
피해자 측 "판사 실수 더 철저한 문책 필요"

우리의 문제 제기는 많은 법조인들을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편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현실이다. 이번 소송을 통해 다시는 장애인 인격권을 침해하는 일이 사법부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염전노예 사건 법률 대리인 최정규 변호사가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한 2017년 10월 16일 블로그에 쓴 글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남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가 가해자인 염전 주인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재판 실수'를 문제 삼으며 국가배상을 청구했지만, 소송 제기 4년 만에 최근 대법원에서 패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조작된 합의서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판사의 책임을 물으려 했지만, 피해자 측은 재판부 사과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해명도 들을 수 없었다.

박모(56)씨는 2001년 1월부터 13년 넘게 1만3,223㎡(4,000평) 규모의 염전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하며 노동력을 착취 당했다. 지능지수(IQ) 43의 지적장애인인 박씨는 2014년 '염전 섬 노예' 사건이 불거지고, 신안군 일대에서 대대적인 경찰 수사가 진행된 뒤에야 염전 주인 A(60)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A씨는 2014년 5월 준사기·감금 등으로 기소됐다.

A씨의 1심 선고를 사흘 앞두고, 광주지법 목포지원 형사1부엔 박씨 명의의 처벌불원서가 제출됐다. "선처를 구한다"고 인쇄된 문서에 삐뚤빼뚤한 박씨의 자필 서명과 무인(지장)이 있었지만, 서류 신빙성 입증을 위해 첨부되는 인감증명서 등은 빠져 있었다. 재판부는 처벌 불원서를 감안해 A씨에게 실형이 아니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수천만 원 임금체불 혐의는 아예 공소기각됐다.

그러나 처벌 불원서는 박씨 뜻과 무관하게 꾸며진 거짓 문서였다. A씨 가족이 박씨가 머물던 노숙인 쉼터에 찾아가, 글을 읽지 못하는 박씨에게 지장을 찍게 하고 재판부에 제출했던 것이다. A씨 항소심 재판부는 뒤늦게 "합의는 없었다"고 사실관계를 정정하면서도 1심 형량은 유지했다. 임금체불 부분에 대한 공소기각 판결 역시 뒤집히지 못했다.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의 민·형사 소송을 맡아 온 최정규 변호사가 지난 2017년 본보와 경기 안산 원곡법률사무소에서 인터뷰를 하며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 변호사는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도 현재 겸임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의 민·형사 소송을 맡아 온 최정규 변호사가 지난 2017년 본보와 경기 안산 원곡법률사무소에서 인터뷰를 하며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 변호사는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도 현재 겸임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씨 측은 이후 "1심 재판부 잘못으로 피해자의 왜곡된 의사가 부당한 양형이유로 반영됐다"며 2017년 10월 국가배상 소송을 냈다. 2014년부터 염전노예 사건의 민·형사 사건을 맡아온 최정규 변호사가 본보 인터뷰 중 "염전노예 사건 법률 지원을 하며 겪은 가장 비상식적인 일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듣고, 박씨 일을 떠올린 게 소송을 시작한 계기였다(본보 2017년 9월 28일자 11면).

그러나 판사의 부실검증 책임을 묻는 소송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최정규 변호사는 소송 제기 전부터 주변에서 "법원한테 찍힐 일 있냐"는 우려 섞인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국가배상 1심 첫 재판에선 판사로부터 "처벌불원서가 제출되면 피해자를 전부 법정에 불러야 하느냐. 그게 가능하냐"는 '까칠한' 질문을 듣기도 했다. 이는 최 변호사의 저서 '불량 판결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가배상 1심 재판부는 한 차례 재판 후 결국 박씨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박씨 측은 즉각 항소했다. 국가배상 2심에선 A씨 1심 사건을 맡았던 목포지원 재판부의 과실을 증명할 추가 증거도 드러났다. 동일한 재판부가 다른 염전노예 피해자들의 처벌불원서에 대해 보다 철저하게 검증해,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례가 2건 발견된 것이다. 최 변호사는 박씨 사건과 다른 피해자들의 재판 검증 절차가 달랐던 경위를 따지기 위해, 당시 목포지원 형사1부 판사 3명을 증인대에 세워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판사 증인' 요청도, '국가배상 청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배상 항소심 판결문에는 "당시 재판부가 시간상 상황상의 제약으로 박씨의 진의를 직접 확인하기 어려워, 제출된 처벌불원서의 기재만 보고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목포지원 재판부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내용까지 담겼다. 피고(국가) 측은 주장한 적도 없는 내용이었다.

대법원도 박씨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24일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리고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심리불속행은 원심 판결에 중대한 법 위반 등 특별한 사유가 없을 때 대법원이 본안 심리 없이 기각하는 것을 뜻한다. 대법원 판결문에는 심리불속행 사유를 설명하는 네 줄이 전부였다.

'판사도 잘못하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당위로 시작한 소송이었지만, 사법부는 책임 인정에 인색했다. 사과는커녕, A씨 1심 재판을 맡았던 판사들의 구체적인 해명도 들을 수 없었다. 최 변호사는 박씨 소송을 진행하면서 주변에서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느냐. 왜 법원과 싸우려 드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최 변호사의 답변은 이렇다.

판사는 한 사람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한 판결을 선고할 권한을 국민에게 위임 받았다. 그렇다면 그 권한을 행사할 때 더 엄격해야 하고, 실수가 있을 경우 더 철저히 책임져야 한다.

최정규 변호사 저서 《불량 판결문》 중

최나실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