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빅테크 겨냥?"독점 규제 재정의해야"
바이든 대통령 지명 받고 32세에 FTC 의장 맡아
"아마존, 독점적 철도망 사업자 같아" 규제 필요 역설
4년 전, 알려지지 않은 로스쿨 학생이 쓴 논문이 미국의 법학계와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표적은 아마존, 저자는 당시 28세의 예일대 법학대학원 재학생인 리나 칸이다. 논문은 온라인 유통망을 장악해 버린 빅 테크(Big Tech) 아마존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반독점을 재해석해 이들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재, 리나 칸은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정부 기관인 연방거래위원회(FTC) 의장 자리에 앉게 됐다.
리나 칸의 등장과 급성장은 미국이 '빅 테크'의 독점 위협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혁신이란 이름으로 임금과 가격을 동시에 내리누르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이들 기업이 유발한 '부의 집중'을 견제하겠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디지털 시대, 독점을 재정의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국내외 언론에서 '아마존 저격수'로 부르는 리나 칸 컬럼비아대 부교수를 FTC 의장에 내정했다. FTC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수장 자리에 오른 것은 분명한 파격이지만, 민주·공화 양당이 인정한 인물이자, 그의 활동과 업적을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인선이기도 하다.
칸은 예일대 법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2017년 학내 논문지인 '예일 로 저널'에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이라는 글을 실었다.
학내 논문지라고는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지 중 하나다. 이 글에서 그는 소비자 구제 중심으로 반독점을 해석하는 1970년대 이래의 최소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온라인 유통에서 비슷한 업종의 기업들을 시장에서 몰아내거나 인수·합병해 독점기업이 된 아마존은 중소기업과 소매 상인들을 플랫폼 위에서만 활동하도록 종속시켰다.
이 기업은 독점의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적으로 떠넘기는 대신, 소비자가격은 경쟁상태보다 약간만 올리고, 대신 공급업체를 압박해 공급 비용을 낮춤으로써 차익을 챙긴다.
이 논문에서 그는 아마존을 19세기 말, 20세기 초 '진보 시대(Progressive Era)'까지 번영했던 독점적 철도망 사업자들에 비유했다. "수천 개의 유통사와 독립기업들은 돈을 벌기 위해선 아마존이 깔아놓은 '철도망'을 따라가야 하고, 결과적으로 최대의 경쟁자에 종속되는 결과에 직면했다"고 썼다.
그는 2018년 뉴욕타임스에 "소비자로서, 이용자로서 우리는 테크 기업을 사랑한다. 하지만 시민으로서, 노동자로서, 기업가로서 우리는 그들의 힘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며 "그들의 지배력을 평가하고 지적하는 새로운 틀과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독점 힙스터" vs 정치권의 신무기
칸은 이 글이 유명해진 순간부터 이미 빅 테크와 그 옹호자들의 경계 대상이었다. 오린 해치 전 상원의원과 조슈아 라이트 전 FTC 의장은 칸과 같은 주장을 하는 '진보주의적 반독점' 일파에 "반독점 힙스터(hipster antitrust)"라는 딱지를 붙였다. 경제 효과를 실증하지 않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미다.
빅 테크 기업들도 직접 나서고 있다. 아마존은 전직 FTC 의장과 위원을 저자로 한, 빅테크를 옹호하는 연구 논문에 노골적으로 연구 자금을 댔다. 이 논문은 아마존을 "수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안겨 주고, 소매와 기술 분야에서 소비자에게 막대한 혜택을 제공한" 또는 "뛰어난 혁신 기업"이라고 찬양했다.
하지만 적이 있으면 우군도 있다. FTC의 민주당 측 위원인 로히트 초프라는 2018년부터 그를 외부 임시 고문으로 기용해 '빅 테크'와의 직접 전선에 끌어들였다. 초프라는 칸을 "법률 신동(Prodigy)"이라고 평가했다. 이제 초프라와 칸은 FTC의 동료 위원이 된다.
현재 미국의 정치권도 정당을 막론하고 빅 테크에 대한 원한이 깊다. 칸은 그들에게 쓸 만한 '무기'를 제공하는 법률 이론가였다. 2020년 7월 하원의원들이 아마존과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4대 빅 테크' 수장을 청문회에 불러들였을 때 그는 하원 사법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하원은 이들 4대 기업을 "석유·철도 재벌 시절에 보던 독점"으로 규정했다. 2017년 칸의 논문이 내린 결론 그대로다.
독점에 민감한 '미국 전통'의 재발명
'아마존 저격수'로 불리지만, 칸은 아마존이 자신의 목표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그동안 "극도로 느슨했던" 반독점법을 1970년대 이전, 옛 원칙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일 뿐이고, 아마존은 이를 설명하는 수단 중 하나라는 것이다.
칸과 그 옹호자들의 주장대로, 미국의 반독점 규제는 19세기 말 '진보 시대'부터 이어져 온 미국의 전통이다.
당시 대통령이던 윌리엄 매킨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정부는 1890년 제정된 '셔먼 반독점법'을 휘두르며 '석유왕'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철도 재벌 노던시큐리티, 담배 회사 아메리칸타바코 등을 여러 회사로 쪼갰다.
1970년대부터 시장 규제의 축소를 강조한 시카고 학파가 득세하면서, 연방거래위원회는 예전만 한 위세를 누리지 못했다. 1999년 법무부가 윈도(window)로 소프트웨어 시장을 독점한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소했지만, 결과는 타협으로 마무리됐다.
칸과 미국 정치권이 2020년대에 지난 세기 초 철도 재벌과 석유 재벌을 거론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에 대응해 '독점기업의 출연에 민감'하던 미국의 전통을 다시 만들어 보려는 의도다.
동시에 금융 위기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위기를 거치며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부의 집중 문제를 해소하려는 조 바이든 정부의 경제 정책 실행 프로젝트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FTC 수장을 맡은 칸은 그 최전선에 섰다. 그의 FTC는 아마존 같은 빅 테크가 소규모 스타트업을 압박해 합병하는 것을 막아서거나, 더 나아가 기업의 일부 부문을 쪼개는 것을 권고하는 등의 방식으로 빅 테크를 옭아맬 수 있다.
물론 빅 테크도 법률 다툼으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되고, 업계의 지원을 받은 칸의 적들도 활동을 이어갈 것이기에 반독점 규제를 둘러싼 투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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