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손배소 각하판결 논란
법관 언어의 허용범위 물음 던져
판사의 주관이 선 넘을 수는 없어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에 의하면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것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심판한다는 뜻이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말은 독립하여 심판함을 강조하는 한편, 법관의 판단을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심화된 질문으로 이어진다.
법관이 법률에 의해 심판한다는 것은 19세기 지식인 막스 베버가 과장되게 묘사한 이슬람 카디 재판에서 보듯 일반적 규칙에 의하지 않고 구체적 사건의 정상(情狀)에 따라 판단하는 식의 사법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체계화된 재판규범을 가진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위의 구문은 법관이 정치적 고려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양심”에 따른 심판에 대해 다수의 법학자들은 개인의 주관적 양심이 아닌 법관의 직무상 요구되는 객관적 양심에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말을 이렇게 풀이하는 것은 규범적 원칙론으로서는 의미를 가지지만 법관의 행태를 현실적으로 분석할 때 여전히 말해주는 것이 별로 없다. 법규는 한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며, 법관이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는 이념, 정치적 고려, 편견은 물론 세속적 이익도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법관에게 허용되는 말의 논리는 일정한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 범위를 일탈하는 경우 법관의 내심은 외부로 폭로되고 그의 말은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다.
일제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사건에서 청구를 인용할 것인지, 기각할 것인지, 소를 각하할 것인지의 선택지는 모두 법리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징용 피해자 승소의 환송심 판결을 확정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의 법정의견과 별개의견,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결과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에 대해 관점에 따라 동의할 수 없는 법해석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정상적인 법관의 언어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알려진 바와 같이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주심 법관의 술회가 나온다면, 판결의 정당성이 훼손되어 “독립운동하는 심정”을 구현하려 했던 원래의 의도는 달성할 수 없다.
이달 초에 선고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한 각하 판결은 그 반대의 입장에서 정치적 언사를 늘어놓고 있다. 이 판결은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소수의견을 따른 것으로서 75% 정도는 차분한 법리적 판단을 담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에서 심각한 ‘오버’를 하여 읽는 이를 아연하게 만든다.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의 전제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배의 합법-불법 논의를 굳이 끌어들임으로써 어느 고등법원장의 꾸지람을 자초했고, 가능성이 없는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의 결과까지 가정하며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의 위신”이 추락할 것을 걱정하는 한편, “서방세력들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 훼손과 그에 따른 한미동맹과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을 우려하는 언설을 구사했다. 일본국위안부 피해자들의 일본국을 상대로 한 강제집행의 적법성을 인정한 며칠 후의 결정은 국가면제를 부정하는 국제법상 파격에도 불구하고 “대일관계의 악화, 경제보복 등”은 “외교권을 관할하는 행정부의 고유 영역이고 사법부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고려 사항에서 제외하고 법리적 판단만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보란 듯이 일갈했다.
일제시대 과거사 사건은 법관의 정치적 관점이나 역사관에 좌우되기 쉽다. 법관이 자기의 관점을 관철하려 한다면 법관에게 허용되는 언어의 틀 속에서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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