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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엔 역도 철로도 없는데...사람들은 왜 기차가 다녔다고 착각할까

입력
2021.07.03 11: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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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김시덕문헌학자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13> 끊어지고 사라진 동해안 철길의 흔적

근대의 한 시기, 전 세계적으로 마치 오늘날 한국의 버스 시스템처럼 국토의 구석구석까지 철도 노선이 놓이고 철도역이 만들어졌다. 한반도 역시, 20세기의 한 세기 동안 철도 시스템에 의해 빠르게 재편되었다. 광복과 6·25전쟁 이후, 구체적으로는 1970년의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계기로 한반도의 교통 체계는 한때 철도에서 고속도로로 그 무게중심이 옮겨갔지만, 최근 GTX·중부내륙선·서해선·동해선 등의 간선철도·광역철도 건설을 둘러싸고 전국이 들썩이는 데에서 철도 시스템의 위력을 시민들이 반세기 만에 재평가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철도가 도로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떠한 공간 구조를 만들어내는지를 한국의 그 어떤 곳에서보다도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지난 100여 년간 길이 어떤 식으로 대서울의 공간 구조를 만들어냈는지를 살피게 될 이 글의 초입에서 강원도 동해안 이야기를 하는 이유다.

100년만의 동서관통, 강릉선KTX

경기도 서쪽에서 강원도 동쪽까지 철도 시스템을 이용해 동서로 이으려 한 시도는 20세기 초부터 있었다. 그러나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려선 철도가 원주까지 연장할 계획을 세우고도 실패했고, 경춘선이 춘천에서 멈췄으며, 중앙선이 원주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등, 한반도 동서 관통 철도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모두 좌절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00년 만에 강릉선 KTX로 실현되었다.


2017년 12월 서울∼강릉을 연결하는 경강선 KTX 개통식을 하루 앞둔 강릉역.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7년 12월 서울∼강릉을 연결하는 경강선 KTX 개통식을 하루 앞둔 강릉역. 연합뉴스 자료사진

강릉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대서울(Greater Seoul)과 강원도 동쪽 끝의 동해안 지역을 이은 것은 도로였다. 강원도 강릉시 서쪽의 성산면은 한반도를 동서로 잇기 위한 지난 100년간의 인간의 활동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1917년 대관령을 관통해서 신작로를 놓은 것을 기념하는 암벽 각석(刻石)과 1975년 영동고속도로를 완공했음을 기념하는 전근대 풍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2017년 개통된 강릉선 KTX가 이들 각석·비석의 바로 북쪽을 지나고 있다. 1917년에 완공되어 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신작로는 영동고속도로·강릉선 개통으로 쇠락하여, 도로 주변의 휴게소들이 잇달아 폐업하고 있다. 반면 영동고속도로와 강릉선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수요를 빼앗아간다기보다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측면이 더 큰 것 같다.

강릉역, 그 오랜 역사

2017년 강릉선 KTX가 개통된 강릉역은, 그로부터 반세기 전인 1962년에 영동선 철도의 역으로 개업했다. 그보다 10~20년 전인 식민지 시기에는 동해북부선이라는 철도의 역으로서 개업할 계획이 세워져서 노반 공사, 즉 철로를 놓기 위한 기초공사가 완료된 상태였다.

동해북부선은 강원도 북쪽의 안변에서 경상남도 남쪽의 부산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놓일 예정이던 철도 노선이다. 1939년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간행한 '조선철도상황 제30회(朝鮮鐵道?況 第30?)'에 수록된 지도에는, 강원도 북쪽 안변부터 강릉을 지나 남쪽 북평까지 공사가 완료되었고, 북평부터 포항까지는 노선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1946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미군의 지도에도, 북평역 바로 아래의 삼척역까지는 철도가 완공되었고, 삼척역부터 포항역까지의 구간은 공사가 중단되었음이 보고되어서 대략의 예상 노선도를 표시하였음이 표기되어 있다.

동해남부선, 지금은 사라진 포항역

옛 포항역. 2014년 김시덕 촬영.

옛 포항역. 2014년 김시덕 촬영.


부산진역에서 출발한 동해남부선은 포항역까지 개업한 상태에서 그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동해남부선 포항역이 영업을 개시한 것이 1945년 7월이었고, 그 한 달 뒤인 8월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포항역은 동해선의 중간 지점에서 동해남부선의 종착점으로서 그 성격을 바꾸었고, 한동안 포항제철 노동자들의 통근열차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동해남부선이 동해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철로도 새로 놓으면서 옛 포항역은 2015년에 철거되었다.

포항역을 이용해 노동자들이 통근하던 포항제철에는 '삼화제철소 고로'라는 국가등록문화재가 있다. 이 시설은 원래 동해선을 통해 포항과 이어질 예정이던 강원도 삼척의 고레카와제철(是川製鐵) 공장에 있었다. 광복 후 고레카와제철은 삼화제철소로 이름을 바꾸어, 오노다(小野田) 시멘트 삼척공장을 이어받은 동양시멘트와 함께 '삼척공업지대'의 핵심 시설로서 운영되다가 폐업했다. 1975년에 개봉한 영화 '삼포가는 길'의 말미에, 이 삼화제철소를 배경으로 철길을 걷는 주인공들의 롱 샷이 찍혀 있다. 포항제철 측은 1945년 8월의 분단 이후 한국 지역에 남아서 운영된 유일한 제철소였던 삼화제철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8개의 용광로 가운데 하나를 포항으로 옮겨왔다.


삼척역 인근의 삼표시멘트. 2019년 이승연 촬영.

삼척역 인근의 삼표시멘트. 2019년 이승연 촬영.


포항제철로 옮겨진 삼화제철소 고로는, 강원도와 경상도의 동해안이 원래는 동해북부선-동해중부선-동해남부선 철도를 통해 하나의 생활권으로 이어질 예정이었음을 상징하는 존재다. 삼화제철소와 동양시멘트가 운영되던 삼척은 1945년의 광복·분단 시점에 경인공업지대·영남공업지대와 함께 한국의 3대 공업지역이었다. 이 공업지역이 한국의 다른 지역과 철도 시스템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건설해 놓은 노반을 활용해서 1950-60년대에 동해북부선 일부 구간을 개통했다.

옛 동해북부선의 흔적들

하지만 철도보다 도로교통을 확충해야 한다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조언에 따라 박정희 정부가 고속도로 건설에 매진하면서(한겨레21 806호 2010년 4월 13일자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늦춰졌다면'), 공업적·상업적으로 큰 의미가 없던 동해북부선의 나머지 구간은 결국 개통되지 못했다. 광복 전에 운행 중이던 동해북부선 구간 중 분단 후 한국에 속해 있던 초구역~양양역 구간도 한국의 다른 철도 노선으로부터 고립되었고, 결국 폐지되었다.


고성군 간성읍의 북천철교. 2021년 김시덕 촬영.

고성군 간성읍의 북천철교. 2021년 김시덕 촬영.


현재 동해북부선 구간의 옛 철로는 거의 모두 걷혔지만, 광복 전에 놓인 노반과 수많은 터널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철도 역사가 있던 간성역·낙산사역·양양역 등의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운행 당시의 플랫폼이 남아 있다. 고성군 죽왕면 송암리의 옛 문암역 근처에는 철도원들이 거주한 철도 관사가 두 채 남아 있는데, 이들 건물에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페치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강원도 고성 지역의 추운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


문암역 철도관사. 2021년 김시덕 촬영.

문암역 철도관사. 2021년 김시덕 촬영.


동해북부선 열차가 운행한 가장 남쪽 역인 양양역에서는, 동해북부선 본선 이외에 지금도 운영 중인 철광산으로 이어지던 지선이 운영되었고, 이곳 광산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을 위한 작지만 우아한 성당 건물이 아직도 산속에 남아 있다. 한편 양양역 터의 바로 근처에는 양양종합여객터미널이 들어설 예정이다. 20세기 전기에 철도 교통의 요지로 지목된 지역이 21세기 전기에 도로교통의 요지로 부활하는 것이다. 동해북부선의 노반은 대부분 도로로 전용되어 활용되고 있기도 하므로,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동해북부선 철도가 만들어낸 공간 구조가 100년 가까운 세월을 거쳐 도로교통으로 그 모습을 바꾸면서도 여전히 뚜렷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양철광 사택에 부속되어 있던 성당. 2021년 김시덕 촬영.

양양철광 사택에 부속되어 있던 성당. 2021년 김시덕 촬영.


심지어 양양역과 강릉역의 중간 지점인 주문진역 폐역 및 도로로 전용된 그 주변의 노반은 열차가 한 번도 운행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곳에 열차가 다녔고 그 주변으로 철길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옛 협궤열차이던 수인선의 인천 구도심 구간이나, 요즘 핫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는 전라북도 군산의 옛 경암동 철길 주변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주문진역 광장이 될 예정이던 공터에 6·25전쟁으로 발생한 피난민들이 10여 년 전까지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강원도민일보 2009년 2월 17일자 '주문진 피난민촌 5월 철거'), 철도청에서 동해북부선을 언젠가 건설할 계획이어서 노반 지역을 철도 지목으로 묶어 놓았던 것이 이런 경관을 만들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피란민촌이 있던 주문진역 광장 예정지. 2021년 김시덕 촬영.

피란민촌이 있던 주문진역 광장 예정지. 2021년 김시덕 촬영.

양양역 옆에 건설 중인 버스터미널, 열차가 달린 적이 없는데도 마치 철도가 운행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주문진역 주변의 노반. 이들은 철도가 근대 한반도 도시의 경관을 만들어냈음을 21세기의 한국 시민들에게 전하는 도시 화석이다.

지난 100여 년간 철도와 도로가 상보적 관계를 이루며 공간 구조를 만들어낸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근현대 한반도의 길이 도시 경관을 만들어낸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공간의 실험실'이다. 한반도 북부와의 철도망 재연결 사업으로서 신설될 동해선은 옛 동해북부선 노선을 재현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전에 동해북부선이 지나던 지역들을 관통할 예정이다. 한때 동해북부선 철도를 통해 근대 도시로서의 교통망을 갖추었고, 분단과 교통 정책의 변화로 인해 철도가 사라진 뒤에도 그 경관을 유지해온 강원도 동해안 지역이, 신설될 동해선 철도에 의해 어떠한 경관 변화를 보일지 주목하고 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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