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송 속도전 열광 그만" 자성 나와
택배노동 환경 개선할 소비패턴 추구
"사회적 합의 이행 여부도 지켜봐야"
지난달 물류센터 화재를 계기로 국내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쿠팡에 대한 불매 운동까지 벌어진 가운데, 소비자 사이에서 이른바 '빠른 배송'에 기반한 소비문화를 자성하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제품 선택부터 인수까지 소비자 편의를 극대화하려는 쇼핑 방식이 결국 물류·배송 노동자의 근로환경 악화를 부추겼다는 반성에서다. 일부는 소비 과정에서 택배 노동자와의 상생을 도모하는 '느린 배송' 방식을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어 확산 여부가 주목된다.
택배 참사, 쿠팡만의 문제일까
6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온라인 쇼핑에서 빠른 배송을 우선시했던 소비 관행을 돌아보자는 의견이 활발히 개진되고 있다. 지난달 포털사이트 맘카페에는 "답답하더라도 더 이상 총알 배송에 열광하지 말자"는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왔고, 이에 공감한다는 댓글이 100여 개 달렸다. 해당 글을 쓴 전모(33)씨는 "배송은 무조건 빨라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단체도 가세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은 "경쟁적인 택배 배송 속도전으로 인해 관련 직종 종사자들이 과로하는 등 각종 사회적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자성 여론이 형성된 결정적 배경은 쿠팡에 대한 실망이었다. 김동식 소방령이 순직한 지난달 경기 이천시 물류센터 화재 사고에서 쿠팡은 화재 당일 김범석 창업자의 국내법인 이사직 사임을 발표하고 사과는 사고 사흘 만에 하는 무책임한 대처로 비난을 샀다. 이 과정에서 지난 1년간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 9명이 과로사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은 사실도 새삼 조명받았다. 국내 온라인 쇼핑몰 중 배송·물류 노동자 처우가 그나마 낫다고 평가받던 쿠팡의 잇따른 악재는 쿠팡이 선도해온 '빠른 배송' 경쟁에 근본적 회의를 불렀다.
최근 쿠팡을 탈퇴했다는 백모(26)씨는 "택배가 예상보다 하루만 늦어도 배송 현황을 들여다보며 화낸 적이 적지 않다"며 "택배 관련 참사에 빠른 배송을 부추긴 이용자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쿠팡 이용을 관뒀다"고 말했다.
'느린 배송' 추구하는 소비자들
배송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 쇼핑 방식을 선택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수요를 사전 조사해 그에 맞춰 생산 및 배송 시기를 조절하는 '프리오더(선주문)'나 '크라우드 펀딩' 방식에 대한 관심이 대표적이다. 카카오메이커스에서 크라우드 펀딩 제품을 즐겨 구매한다는 임모(39)씨는 "상품이 금세 출고돼 과소비하기 쉬운 빠른 배송과 달리 소비에 분별이 생긴다"며 "배송 문화 개선에 힘을 보태고자 일부러 느린 배송을 고수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업계와 기관에서도 느린 배송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온라인몰 퍼밀은 소비자에게 채소나 과일 주문을 받은 뒤 품질이 최고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을 뒀다가 배송하는 ‘달구지 배송’을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동작구는 어르신을 배달 기사로 고용해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거북이 택배’ 사업을 운영 중이다. 동작구 주민 김모(50)씨는 "일반 택배비보다 저렴할 뿐만 아니라 택배 노동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는 사회적 가치에 끌려 자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느린 배송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고질적인 택배 노동 문제 해결에 전환점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시민들이 현 배송 문화에 적신호가 켜졌음을 깨달았고 이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라며 "소비자가 직접 시장 환경을 바람직하게 바꿀 수 있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배송 문화 개선 노력과 더불어 택배 노사 간 사회적 합의 이행 여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부도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지난 1월 이미 택배 분류 작업 분담에 대한 합의안이 나왔지만,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가운데 물류센터 화재와 같은 문제가 되풀이됐다"며 "오는 9월부터 시행될 분류 작업 합의안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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