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게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소음이 아닌 소리가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 옛날 배가 드나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 인천 동구 배다리 마을에 자리잡은 단독주택 '오붓(대지면적 85.6㎡, 연면적 87.49㎡)'은 그런 마음으로 탄생했다. 라디오 PD로 17년간 일한 안병진(44)씨와 화면해설 작가인 이진희(44)씨 부부는 30년 넘은 다가구 주택을 고쳐 4년째 살고 있다. 결혼 후 아파트 3곳을 거쳐 정착한 이 집에서, 부부의 삶은 오붓의 뜻처럼 훨씬 '홀가분하고, 아늑하고, 정다워졌다'고 했다.
헌책방 골목, 100년 넘은 초등학교... 동네와 녹아든 집
집의 외관은 얼핏 보면 리모델링했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벽돌을 그대로 둔 채, 살짝 정리만 한 정도다. 오붓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심인희 AAPA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주변 건물이랑 어우러지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요구대로, 동네에서 튀지 않는 집을 만드는 게 주안점이었다"고 설명했다.
동네에 애정이 많았던 부부는 자신들의 집이 동네에서 비쭉 솟아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부부는 이 집이 옆집과 뒷집, 마주하는 100년 넘은 초등학교, 인근 헌책방 골목과 조화롭기를 바랐다. 집을 산다는 것은, 집이 위치한 동네의 관계망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서다.
"저희 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이 집을 못 찾아요. 학교 앞이라고 해도 이 집인지, 저 집인지. 그만큼 굉장히 평범한 집인 것 같아요. '잘 손봤네' 정도인 거지 대대적으로 무언가 꾸몄다고 보기 어려운 집이죠." (안병진)
부부는 2018년, 아파트를 6년 만에 '탈출'했다. 층간소음 때문이었다. 둘 다 라디오 PD와 작가로 오랫동안 일해 와서인지 소리에 유독 예민했다.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공동주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진짜 '내 집'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이씨는 "땅을 딛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고, 아파트는 왠지 오롯이 우리의 집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다"며 "오붓하게 살 수 있는 우리만의 온전한 집을 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리모델링 비용과 같은 현실적인 고민들이 발목을 잡았다. 그때, 구도심인 배다리(인천 동구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안씨는 "구도심은 과거 도심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전철, 마트 같은 기본적인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아파트 전셋값으로도 주택 매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컸다"고 했다.
그러면서 "단독주택이라고 하면 전원주택이나 TV에 나오는 으리으리한 집만 생각하는데, 우리는 역설적으로 단독주택이 저렴해 좋았다"며 "주택에 살고 싶은데 비용이 고민이라면 구도심 단독주택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배다리는 학창 시절을 인천에서 보낸 남편에게 친숙한 동네로, 부부가 자주 산책하던 코스이기도 했다. 아내도 "한적함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진 이 동네를 좋아했다.
지하실과 옥상을 품은 단독주택
집의 1층은 공용 공간이라는 용도에 맞게 개방감이 들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1층에는 원래 방 2개, 화장실 1개가 있었지만 방 1개만을 남기고 모두 텄다. 방 1개는 서재로, 나머지 공간은 주방과 거실로 만들었다. 서재도 방문을 없애 열려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 이씨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리모델링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집 안에 계단이 생겼다는 점이다. 독립된 세대가 거주하도록 기존에는 각 층에 외부 출입문만 있었다. 하지만 부부가 지하, 1층, 2층을 모두 쓰게 되면서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3개 층을 내부 계단으로 이었다. 또 계단 옆 벽면을 전면 책장으로 만들어 자칫 죽은 공간이 될 수 있는 계단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침실과 작은 방, 드레스룸, 화장실이 있는 사적 공간이 나온다. 이 집의 역사를 작은 것이라도 남기고 싶어했던 부부의 생각은 2층 작은 방과 드레스룸 앞에 달린 슬라이딩 도어에서도 드러난다. 부부는 원래 이 집에 있던 문을 버리는 대신 공간에 어울리도록 '살려'냈다.
이 집이 품은 지하실과 옥상은 아파트와의 차이가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공간이 달라지면, 삶도 달라진다. 부부는 볕 좋은 날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탁 트인 동네 전경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주변이 모두 주택가라 시야를 가리는 게 없다. 안씨는 "옥상에 빨래를 너는 일은 아파트에 저당잡힌 직사광선과 바람을 되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스크를 벗고 차를 마시거나 낮술을 즐기기도 한다. 집 앞 초등학교 야구부가 훈련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도 소소한 기쁨이다.
기존 집에서 방치됐던 공간인 지하실은 부부가 취미 생활을 누리는 아지트가 됐다. 녹음실, 커피 로스팅 기기, LP판과 턴테이블이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안씨는 "지하실은 사람으로 치면 웅크린 자세의 공간 같다"며 "땅 아래, 어둡다는 특성 때문인지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했다.
소음 대신 소리를 찾았다
부부가 아파트에 계속 살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그래도 아파트는 오르니까.' 하지만 결국 단독주택에 살기로 했다. 안씨는 "투자 대상, 미래의 자산이 되어 주는 집 대신에 집이 지금의 우리를 즐기기 위한 공간이 되기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하실을 고치면서 자신이 공간을 꾸미는 일을, 옥상에서 방울토마토를 기르면서 화분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집에 맞춰 사느라 그간 사과 박스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CD 3,000여 장도 이제는 서재 한쪽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다. 이씨는 "미래를 저당잡히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게 이런 집이라고 생각했다"며 "단독주택에 살면서 더 자유로우면서 독립적인 일상을 꾸리게 됐다"고 말했다.
'소음' 대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단독주택이 준 선물이다. 거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초등학생들의 이야기와 옆집 기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부부가 4월 낸 책 '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북스토리)'에는 이런 삶의 변화가 담겨 있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후 어느 날 아침 멀리서 들리는 낮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정신 차리고 들어보니 멀리 항구에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였다. 바다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소리는 우리를 흔들어 깨워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가 바다에서 멀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단독주택으로의 이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을, 소음이 아닌 소리가 있는 삶을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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