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한국일보>
좋아하는 물고기가 뱀장어다. 오해는 마시라. 장어구이는 입에도 안 대니까. 티 안 나는 뱀장어 사랑이 시작된 것은 책을 한 권 읽고 나서다. 물고기 박사 황선도의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 2019년에는 '친애하는 인간에게, 물고기 올림(동아시아 발행)'이라는 고상한 제목의 개정판도 나왔다.
이 책에는 '현대판 자산어보'라는 부제대로 한반도를 둘러싼 삼면의 바다에서 잡히는 온갖 물고기가 등장한다. 고등어, 명태, 조기, 갈치, 홍어 등. 모두가 책 한 권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지만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내 사랑 뱀장어다. 도대체 뱀장어가 왜 대단한지 설명해 보겠다.
교외에 나가서 먹는 장어구이의 주인공 민물장어는 사실 '민물' 뱀장어가 아니다. 평균 5~7년간 강에서 생활한 뱀장어는 자손을 낳을 준비가 되면 가을 무렵 강 하구로 내려간다. 하구에서 두세 달 머물며 바닷물에 적응한 뱀장어는 고향을 찾아 망망대해로 나서는 기나긴 여행을 떠난다. 바다에서 자라다 알을 낳을 때 강물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정반대다.
바다로 떠난 뱀장어가 도대체 어디서 산란을 하는지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야 한국, 일본, 중국 등의 강에 살던 뱀장어가 북태평양 서쪽 괌 근처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 인근에 알을 낳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의 강에서 마리아나 해구까지 찾아간 뱀장어는 알을 낳고서 죽는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흠칫 놀랐을 테다. 그 알에서 깨어난 뱀장어 새끼의 사정은 어떨까. 북태평양에서 태어난 이 뱀장어 새끼는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약 6~12개월간 3,000㎞를 여행한다. 태평양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북적도 해류를 따라서 이동하다가 대만에서 일본으로 흐르는 구로시오 해류로 바꿔 타고 동북아시아까지 온다.
이렇게 동북아시아 대륙붕에 도착한 뱀장어는 그제야 실뱀장어의 모습으로 한국, 일본, 중국의 강 하구로 찾아간다. 이렇게 강을 타고 오르는 실뱀장어를 잡아 기른 것이 바로 우리한테 익숙한 민물장어다. 사실 이 또한 미스터리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어미가 살던 곳을 도대체 뱀장어 새끼는 어떻게 찾아가는 것일까.
사정이 이러니, 우리가 먹는 뱀장어는 예외 없이 수천㎞의 장엄한 여행을 마친 영웅이다. 이런 사연을 알고 나서는 불판에서 꿈틀대는 뱀장어가 불편해졌다. 실제로 뱀장어의 이런 사정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소개했더니,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그 장어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장어구이는 먹지 않기로…" 나도 그랬다.
책꽂이 잘 보이는 곳에 꽂아 두고서 철 따라 식탁에 오르는 물고기가 달라질 때마다 펴보는 '친애하는 인간에게, 물고기 올림'과 뱀장어를 다시 떠올린 계기도 있다. 낙동강 하굿둑의 수문을 한 달간 열었더니 뱀장어가 나타났다는 뉴스 때문이다. 바로 저자가 이 책에서 낙동강, 영산강, 금강 등의 어귀를 막고 있는 하굿둑의 수문 개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안타깝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뱀장어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뱀장어 씨가 마르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하굿둑이었다. 하굿둑이 가로막고 있으니 실뱀장어는 강 오름으로 수천㎞의 여행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강에서 서식하던 어미 뱀장어는 하굿둑에 막혀 바다로 나갈 수가 없었다. 딱 한 달, 낙동강 하굿둑을 개방했더니 금세 상황이 바뀌었다.
사실 뱀장어뿐만이 아니다. 하굿둑과 오랜 시간의 남획에 더해서 기후 위기까지 겹치면서 한반도 인근 해양 생태계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 정약전이 '자산어보(1814년)'를 쓸 때와는 한참 전에 사정이 달라졌고, 앞으로 '친애하는 인간에게, 물고기 올림'에서 언급한 바다 동물도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크다. 낙동강 하굿둑을 열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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