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
신성로마제국의 조각들로 분열돼 있던 중세 이래 독일은 두 차례 통일을 이루었다. 냉전의 서막이 된 동서독 통일과 나폴레옹 3세 체제의 프랑스와 전쟁까지 치르며 완성한 187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 체제의 통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비스마르크 체제였다. 그는 통일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내다본 정치인으로 국내외 저항을 뚫고, 절묘한 외교력과 전쟁까지 불사하는 카리스마적 추진력으로 그 과업을 완수했다.
그는 왕정, 토지귀족 중심 봉건제 최후의 기사라 할 만한 정치인이었다. 프로이센 융커 집안에서 태어나 막대한 유산 덕에 좋은 교육을 받으며 평생 생계 걱정 없이 산 그는 자신이 누린 봉건 신분의 지위를 당연시했고, 군주 편에 서서 시대정신이라 할 만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체제 저항, 예컨대 프랑스 2월혁명의 영향으로 시작된 1848년 봉기에 자신의 소작농을 무장시켜 진압하려 했을 정도로 반동적이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지방의회 의원을 지낸 그는 프로이센 국왕의 신임을 얻어 외교관을 지냈고, 1862년 수상에 취임한 직후인 그해 9월 군비 강화를 위한 군사예산 증액(징세 확대)을 골자로 한 유명한 '철혈 연설'을 했다. "여론은 바뀌는 법이며, 신문 보도를 여론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의 사명은 국민의 목소리를 지도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행동하는 것이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당면한 문제는 오직 쇠와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이 완고한 권력자는 하지만, 이미 깊이 스민 산업자본주의의 그늘도 볼 줄 알았다. 산업현장 노동자의 사고와 부상, 퇴직 이후의 생존권이 그것이었다. 1880년대 그가 추진한 일련의 사회보험, 즉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노령연금과 장애연금보험은, 물론 노동자 계층의 반체제화 가능성을 차단하고 사회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였지만, 2차대전 이후 영국의 이른바 '베버리지 모델'과 더불어 현대 사회안정망의 주요 얼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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