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총보다 질긴 이념전쟁
편집자주
2014년 잠시 연재했던 ‘정승임의 궁금하군’을 다시 새롭게 시작합니다. 군 세계에 정통한 고수보다는 ‘군알못’(군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는 글을 씁니다.
‘입체파 창시자’인 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답게 그 이름값을 했습니다. 숨 막힐 듯한 기록적 폭염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대유행 속에서도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한창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하루 관람객이 3,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문전성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국내에 전시된 피카소 작품의 총 값어치는 2조 원, 그 무게는 25톤에 달할 정도로 ‘블록버스터급 전시’지만 아쉽게도 그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는 빠졌는데도 말입니다.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입니다. 피카소가 1951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6·25 전쟁을 소재로 그린 작품입니다. 2m에 달하는 화폭의 오른편엔 투구와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총칼을 겨누고 있고 그 반대편에선 임신부와 아이들이 잔뜩 겁에 질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의 작품에 ‘코리아(korea)’가 들어가다니. 반갑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영광(?)이기도 합니다. 반전 화가로도 이름을 떨친 그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쩌면 이름도 들어보지도 못했을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그 아픔까지 공감해준 것이니 말입니다. 더구나 ‘한국에서의 학살’은 피카소가 자신의 고국인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게르니카’(1937년),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을 모티브로 한 ‘시체구덩이’(1946년)와 더불어 3대 반전걸작으로 꼽힙니다.
그 시절 피카소는 어떻게 6ㆍ25 전쟁에 관심을 가지고 붓까지 들게 됐는지 그 사연이 궁금해집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우키요에 판화를 선보이며 반 고흐를 비롯한 유럽 화가들을 사로잡았던 일본이라면 모를까. 당시 우리가 피카소를 잘 몰랐듯, 서구 예술가들에게 동양의 작은 반도국가 한국은 존재조차 희미했을 테니까요.
'프랑스 공산당' 입당 피카소… "나치 항거"
답은 그가 입당해 소속됐던 공산당에 있습니다. 스페인 태생이지만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던 피카소는 한국전쟁 발발 6년 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합니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했던 냉전시대였기에 공산당은 그의 명성을 선전에 이용하려 한 것이지요.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위마니테가 1944년 10월 5일자에 “프랑스의 부흥을 위해 피카소가 드디어 당원에 됐다”며 그의 입당 소식을 대서특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피카소도 꺼리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입당 직후 “공산당 입당은 나의 논리적 귀결”이라며 조국 스페인에서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서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운 것은 공산당이라고 강조했습니다. 1937년 4월 26일, 우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요청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이 스페인 북부 소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실에 분노했던 그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독일 나치는 자신들의 전투기와 폭탄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민간인을 상대로 3시간이나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장날을 맞아 시장 근처에 모였던 시민 1,600여 명이 몰살됐고 이에 분노한 피카소의 붓에서 ‘게르니카’가 나온 겁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당시, 피카소 집에 쳐들어온 게슈타포(나치하의 정치경찰)가 게르니카를 가리키며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나”라고 물었을 때 그가 “당신들이 그렸다”고 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인데요. 이것 역시 그의 공산당 입당을 부추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산당 지시로 6·25전쟁 그려... '반미 선전’ 활용
한국에 문외한인 피카소가 6ㆍ25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건 공산당을 통해서였습니다. 위마니테가 1950년 6월 26일자 1면에 ‘한국에서 워싱턴의 꼭두각시에 의한 심각한 전쟁 도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겁니다. 북한이 소련(러시아)을 설득해 남침해 놓고 ‘6ㆍ25는 북침전쟁’이라고 우기는 것과 어딘가 닮았습니다.
6ㆍ25 전쟁은 공산당에 반미를 선전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나치가 예의주시할 정도로 게르니카의 파급력을 실감했던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제2의 게르니카’를 그리라고 주문한 거지요. 미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반대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정보를 주로 위마니테를 통해 얻었습니다. 북한군의 승리를 부각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내용 위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카소가 공산당의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했다면 이 그림에 등장하는 총을 겨누는 가해 군인은 미군, 겁에 질린 민간인은 북한 주민입니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학살’은 정치적 의도하에 제작된 선전물이었던 거지요. 우리에게 반가운 이 그림이 이데올로기 싸움의 결과물이었다니, 어딘가 씁쓸하고 서글픕니다.
'빨갱이 화가' 낙인… 물감에 ‘피카소’ 붙여도 잡혀가
다만 피카소는 공산당의 의도대로 100% 움직이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를 그림에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겁니다. 일단 배경이 한국스럽지 않습니다. 가해자도 미군보다는 오히려 중세 유럽의 군인을 연상시킵니다. 피카소가 오마주(다른 작품 인용)한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에서 멕시코 황제에게 총구를 겨누는 군인이 프랑스 군복 차림인 것과 대조적이지요. 피해자도 딱히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내 그림을 선전도구로 악용하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는 피카소의 소심한 복수로 해석됩니다.
역사적 배경 역시 모호합니다. 한때 이 그림이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의 학살사건이나 같은 해 7월 충북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천 학살 사건은 1952년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해 알려졌는데, 피카소가 이미 작품을 완성(1951년 1월 18일)한 이후라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노근리 학살사건 역시 1990년대 들어서야 대중에게 알려졌고요.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이 그림이 1951년 5월 프랑스 살롱 드메 전에서 공개될 당시, 공산당은 불평 불만이 컸다고 합니다. 선전화치고 구체성이 떨어지는 데다 공산당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도 거리가 멀었던 거지요.
공산당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이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당장 피카소의 입국을 금지했고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은 사찰에 들어갔습니다. 피카소의 행적은 물론이고 미국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 거래 내역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미국 내에서 전시 역시 한동안 금지됐지요.
냉전논리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빨갱이가 그린 그림’이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은 물론,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됐습니다. 1969년 서울중앙지검이 ‘피카소’ 상표를 내건 크레파스와 물감을 만든 삼중화학 대표 박모(45)씨를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에 해당 업체는 ‘피닉스’로 상표를 바꿔야 했지요.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국가가 몰락하고 이어 소련이 해체되는 등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피카소 그림도 반입금지 예술품 목록에서 빠졌습니다. 하지만 ‘빨갱이 리스크’가 남아서인지 국공립미술관이 ‘한국에서의 학살’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지만 여러 차례 불발됐습니다. 2011년엔 이 그림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두고 보수 진영이 반발했습니다. 6ㆍ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이 70년 만에야 한국 땅을 밟게 된 사연입니다. 정치적 작품이라는 비난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했고 이념 논쟁이 무의미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실제 그의 작품 전시를 놓고 극우단체의 집회나 반발도 없었습니다.
정치권이 다시 꺼낸 ‘미소 점령군·해방군’ 논란
하지만 정치권의 시계는 거꾸로 가는 모양입니다. 이달 초 김원웅 광복회장과 여권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가 불 지핀 ‘미군은 점령군, 소련은 해방군’ 논쟁은 우리를 다시 70여 년 전으로 되돌려 놨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일왕의 항복까지 받아낸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이 1945년 9월 한반도에 상륙해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거해 본관 휘하의 군대는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occupy)함”이라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삼은 겁니다.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칭했기에 점령군이라는 겁니다. 당시 포고령 말미에 “조선 인민이 해방의 주체이며, 조선의 독립이 점령의 목적”이라고 언급한 부분도 쏙 뺀 채 말이지요. 반대로 소련은 이반 치스차코프 극동군 제25군 사령관이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라고 언급해 해방군이었다는 주장입니다.
미소의 한반도 분할 통치의 본질을 외면한 채,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만 집착한 것이지요.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은 해방군’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설명하기엔 당시 한반도 상황이 너무 복잡했습니다. 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에도 악랄한 ‘35년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게 해준 결정적 계기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승리였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곧바로 독립을 원하는 우리 의사를 무시하고 미국과 소련이 각각 자신들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과 북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일본 패망에도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의 점령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다만 국제법상 미국과 소련은 모두 점령군 지위였지만 일반 민중들의 눈엔 일제 치하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구원군이자 해방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존 하지 미국 제10군 제24군단 사령관이 인천에 상륙하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우리의 완강한 독립의지를 읽었는지 194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은 문서상 점령군에서 주둔군으로 전환했습니다.
6·25는 이념전쟁, 피해자는 무고한 민간인
오늘은 6ㆍ25 전쟁을 잠시 멈추기로 한 정전협정 체결 68년째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은 표면적으론 남북 간 내전이었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공산국이 총출동한 체제 싸움이자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남북 전쟁인데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이 당시 협정문에 서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6ㆍ25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이 많은 전쟁으로도 유명합니다. 좌우익 갈등이 집단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사자는 남북 합쳐 약 300만 명인데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전사자의 5배에 이른다는 추산이 있을 정돕니다. 배고프다는 공산당원에게 쌀을 줬다는 이유로, 배고파서 공산당에게 쌀을 받아왔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이념과 무관한 이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등이 대표적이지요.
남북이 서로를 겨냥했던 총격을 68년째 멈추고 국내에서 ‘빨갱이 화가’였던 피카소가 ‘추상회화의 선구자’가 됐지만 정치권은 아직도 색깔론을 불지피며 국민들을 ‘갈라치기’하는 분위깁니다. 70년 전 발생한 이념전쟁의 희생자가 무고한 민간인이었듯, 철 지난 이념논쟁의 피해자는 국민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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