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여행하는 과학쌤’이란 필명으로 활동 중인 이은경 고양일고 교사가 쉽고 재미있게 전해드립니다. 한국일보>
주말 오후 두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춘천의 독특한 서재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방의 두 면을 메운 책장에는 다녀간 손님들의 흔적과 서재지기가 고른 책들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었다. 읽고 쓸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해주는 조금 특별한 서재. 공간 이용료를 지불하면 정성스레 만든 음료가 덤으로 따라온다. 직접 청을 담가 만든 것이 틀림없는 오디 에이드에서 미묘한 과실주의 향이 맴돌았다. 몸에 좋다며 이런저런 요리에 넣어주던 엄마의 매실청이 떠오르는 익숙한 향이었다.
설탕에 절인 과일청을 만드는 것은 단순한 작업 같지만 정성과 기술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술이 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 가스가 차 병이 폭발할 수도 있다. 효모에 의한 발효 현상 때문이다. 단세포 생물인 효모는 포도당과 같은 영양소를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사람을 포함한 많은 생명체들이 영양소를 분해할 때는 산소가 필요하다. 숨을 쉰다는 행위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다. 그러나 효모 같은 생명체들은 산소 없이도 영양소를 분해하는 기작을 갖고 있다. 평상시의 효모는 산소를 이용해 포도당을 분해하지만 산소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발효라는 방법으로 포도당을 분해한다.
여섯 개의 탄소 덩어리인 포도당을 쪼개 세 개의 탄소로 이뤄진 피루브산이라는 물질을 만들면서 에너지를 얻는 과정까지는 산소가 있건 없건 똑같이 일어난다. 산소가 있을 때는 이 피루브산을 세 분자의 이산화탄소로 완전히 분해하면서 많은 양의 에너지를 얻는다. 반면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피루브산이 일부 분해돼 이산화탄소와 에탄올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는 추가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효모의 생장이 더디다.
이렇게 산소가 부족한 환경에서 이산화탄소와 에탄올을 생성하는 효모의 발효를 알코올 발효라 부른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술을 제조하거나 제빵을 할 때 효모의 알코올 발효를 이용했다. 효모에도 다양한 종이 있는데, 야생의 포도 껍질에서 자라는 효모 종과 인위적으로 배양된 효모 종을 적절히 이용하면 와인에 다양한 맛과 향을 입힐 수 있다. 효모에 의해 발효된 빵은 이산화탄소에 의해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며 극소량의 알코올 덕분에 풍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과일청에서 술맛이 강하게 나거나 병이 폭발하는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인위적으로 효모를 첨가하지 않더라도 다량의 당을 포함한 과일에는 자연적으로 효모가 자라고 있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을 정도로 병을 밀봉하면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 에탄올이 생성되고 공기가 빠져나갈 틈이 없으니 가득 찬 이산화탄소에 의해 병이 폭발하기도 한다. 과일청에서 효모의 발효가 일어나는 것을 막고 싶다면 이 작은 미생물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설탕을 넣으면 된다. 그러나 알코올 발효에 의한 적당한 풍미를 담고 싶다면 과일과 설탕, 효모, 산소 양의 적절한 조화가 이뤄져야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늑한 서재에서 엄마의 매실청을 닮은 오디 에이드를 마시는 동안 서재지기의 마음이 전해졌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친절한 공간과 음료를 제공하고자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애썼으리라. 서재의 작은 창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반질반질한 나무 책상을 비추고 오디 에이드의 얼음을 녹였다. 얼음이 다 녹은 오디 에이드에서는 더 이상 술맛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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