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 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한국일보>
처음 시작은 그 상사와 제가 사무실에 둘만 남아 있을 때였어요. 자기 방으로 커피를 타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갑자기 손을 만졌어요. 컴퓨터가 잘 안 된다면서 좀 봐달라고 하더니 이번엔 엉덩이를 만지는 거예요. 전 그저 너무 놀랐어요. 몸을 움츠리면서 그 사람을 쳐다봤더니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어쩔 줄 몰라서 그냥 방을 나왔어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로 둘만 남을 때면 그 사람이 다가왔어요. 아무리 "싫어요" "불쾌합니다" "이러지 마세요"라 해도 소용없었어요. 손을 잡고 놔주지 않거나 몸을 가까이 대면서 밀착하거나, 어느 날은 "좋아한다"며 절 안으려고 해서 울면서 뛰쳐나간 적도 있어요. 갑자기 손등이나 목덜미에 뽀뽀하기도 하고요.
나머지 직원 분들은 외근이 잦아서 사무실에 잘 있지 않아요. 한 번은 너무 무서워서 한 동료분께 겨우 꺼낸 말이 "꼭 나가셔야 돼요?"였어요. 그 다음엔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다른 직원 분들이 하나 둘씩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할 때면 사무실 그 공간이 공포스러워서 견디기 힘들었어요.
제가 가만히 있었던 게 절대 아니에요. 거부 의사를 표현할 때마다 그 상사는 꼭 카톡으로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뿐이고 둘만 남으면 다시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그만둬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때마다 저를 망설이게 만든 건 지금 제 상황이에요. 저는 나이도 꽤 있고 남편은 일을 나가지 않아서 제가 가장이거든요. 이만한 조건에 새 직장을 구하기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 나만 참으면 우리 가족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절 붙잡았어요. 회사에 말하면 비밀보장이 안 될 거 같고, 알려지는 순간 전 회사를 다닐 수 없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 계약직 직원이에요. 그 사람은 임원이고요. 줄곧 "회사 경영이 어렵지만, 그래도 내 말 잘 들으면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줄게"라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 말이 곧 계약연장이란 걸 저는 잘 알아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괴롭고, 아침만 되면 불쾌감과 공포심이 밀려듭니다.
연차를 냈더니 '미안하다'는 카톡을 계속 보내더군요. 반응하지 않았더니 집 앞까지 찾아왔어요. 클릭 몇 번이면 인사서류를 볼 수 있을 테니 주소야 금방 알았겠지요. "내가 그만둘 테니까 회사에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다시 회사를 나갔더니 그 사람, 멀쩡히 앉아서 일하고 있더군요. 또 둘만 남게 됐을 때 자기 방에서 제 이름을 부르면서 신음 소리를 냈어요. 그때 소름이 확 끼쳤답니다.
처음 그 사람의 사과를 받아줬던 제 잘못일까요? 회사에다가 문제제기하지 못하고 계속 출근하는 게 잘못이었을까요? 제가 바보같이 행동했으니 제 탓일까요? 저만 힘들어할 뿐,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하고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 사람은 물론, 참고 있는 저 자신도 미워요. 결국엔 제가 회사를 떠나야 하나 싶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A씨(40대 여성·제조업종 사무직)
생계가 볼모가 되는, 잔인한 출근길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라면, 피해자는 아무래도 상사의 눈치를 더 보게 되지요. 계속 일하려면 상사의 반복되는 사과를 믿고 싶은 마음도 드셨을 겁니다. '혹시 계약 연장이 안 되면 어쩌지?' '일자리를 잃으면 내 가족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해결하려는 마음보다는 불안감에 한없이 빠지게 됩니다. 그동안 참으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과 그로 인한 불쾌감은, 한 사람의 인격을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인사권을 가졌다 해서 상사가 내 인격을 침해할 권리까지 가진 게 아니에요.
또 직장 내 성희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근무를 하기 위한 거래대상도 아닙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 내 성희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제12조) 규정하고 있어요.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도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스텝, '고충처리 담당자' 찾기
해결 방법은 사내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만 쉽지 않죠. 우선 30인 이상 사업장은 '고충처리 담당자'를 두게 되어 있습니다. 공공부문은 규모와 상관없이 있어야 하고요. 첫 번째 단계는 우리 회사에 고충처리 담당자가 누군지 확인하는 겁니다. 같은 회사 직원이라도 누가 담당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회사 동료나 본인 직속 상사부터 찾아가는 건 추천하지 않아요. "일 크게 만들지 말라"고 쉽게 말하는 동료나, 자기 팀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 불편해 무작정 뭉개는 상사 때문에 더 상처 받고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적어도 고충을 겪고 있는 직원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책임있는 사람을 찾으세요.
고충처리 담당자와 미팅을 잡고 그 자리에 가기까지가 굉장히 두려운 과정이기도 합니다. '내가 보호받을 수 있을까?' '이 사람 믿을 수 있나?' '회사에서 당한 일을 회사 사람에게 알리는 게 잘하는 일인가?' 오만 가지 질문이 떠오르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문제를 빨리 해결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계속 참고 견디는 피해자분들도 있어요. 결국 정신적으로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까지 피해자만 힘에 부치게 됩니다.
우선 1차로 담당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확인을 받아 놓는 것도 방법입니다. '고충처리 기구를 통한 문제제기로 내가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확인받으면 심리적으로 조금은 두려운 마음을 덜 수 있을 거예요.
잊으려 애썼던 기억의 복기…'객관화'가 필수
이제부터 필요한 건 여러 서류 절차예요. 고충처리 담당자에게 성희롱·성폭력 고충상담을 신청하고 피해 사실을 적은 문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합니다.
피해자분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과정 중 하나가 바로 이 단계입니다. 날짜와 피해 내용을 정리해야 해요. 잊으려 했던 기억이다 보니 다시 떠올릴 때 기억이 뒤섞이기도 합니다. 일상처럼 반복됐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관계가 어긋나면 가해자가 발뺌할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어요. 그런 논쟁까지 가면 더 힘들어지니 가장 최근에, 가장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부터 떠올려 보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내가 처했던 일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기억을 떠올리며 불쾌했다, 무서웠다고만 하면 안돼요. 회사와 상관없는 외부인이나 전문 상담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이 부분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져야 해요.
성희롱, 성추행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정리해 온 걸 보면, 의외로 회사나 상대방 입장으로 써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 입장을 피해자인 내가 굳이 고려해 주면서 스스로 자책하듯이 쓰는 거지요. '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문제'라는 인식 정리가 안 되면 내적으로 더 힘들고 주저하게 돼요. 객관화를 위한 정리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세요. 그러면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하실 수 있을 거예요.
고충 처리 신청서가 접수되면 바로 분리조치를 요구하세요.
"가해자의 뻔뻔함에도 움츠리지 마세요"
조사가 시작되면 대개의 가해자들은 "악의는 없었다" "상대방이 가만히 있었다" 등의 말로 빠져나가려 합니다. 보통 회사에서 고충처리 담당자보다는 징계위원회 구성원들의 직급이 더 높습니다. 그러다 보면 중간에서 사건을 무마하려는 시도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가해자가 임원급인 경우 "퇴직도 얼마 안 남은 사람인데 굳이…" 같은 말은 징계 논의 과정에서 나오는 단골 멘트입니다.
그럴 땐 추가의견서를 내세요. 가해자의 주장이 틀렸고, 나는 분명 거부를 했으며, 엄중한 조치를 통해 안전한 근무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내용을 쓰시면 됩니다. 보통 일반 기업들은 10일 이내 고충처리를 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밝히면, 당연히 회사 측도 압박을 받게 됩니다. 회사 분위기에 맞춰 예상 반응과 대응 시나리오를 미리 짜두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안전한 일터는 노동자의 권리입니다. 일상을 유지하는 힘은 부당함을 참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데서 나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노동자회(대표번호 1670-1611)는 전국 11개 지부(서울·인천·부천·전북·광주·안산·부산·마산·대구·수원·경주)에서 '평등의전화'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차별과 성희롱을 비롯해 임금체불, 부당해고,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하는 불리한 대우, 폭언·폭행 등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겪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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