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부모님과 살고 있는 20대 취업 준비생입니다. 사이가 안 좋은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서로의 험담을 해 너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한 번 이혼했다 재결합한 부모님이 또다시 이혼을 하실까 걱정이 됩니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성인이 되자 이혼하셨습니다. 아버지만 몇 년 나가셔서 따로 살다가 지금은 또 같이 살고 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의 갈등이 해소돼 재결합하셨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작은 사업을 하시며 수입이 안정적이에요. 아버지는 직업 특성상,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1년 중 상당 기간을 집에서 쉬는 날이 많고요. 그래서 어머니가 집안 경제를 사실상 책임지셨는데 이게 주로 두 분이 싸우는 이유입니다.
제가 힘든 건 두 분이 그 험담을 저와 제 동생에게 하는 겁니다. 어머니는 "너네 아빠가 지금까지 금전적으로 도와주지 않아 정말 힘들었다" "저렇게 일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꼴이 보기 싫으니 할 수만 있으면 나가 살라고 하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아버지는 "너희 엄마는 내가 돈을 벌어 오는 족족 달라고 해서 남는 게 없다. 너네 엄마가 다 뜯어갔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두 분은 늘 '이제 네가 다 컸으니 말하는 거다'라고 하시지만 저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두 분 말씀을 듣다 보면 각자의 입장이 이해가 돼 동조해 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한 분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요.
부모님 사이에서 중재하려고도 해봤는데 상황만 악화해요. 얼마 전에도 어머니가 짜증을 내며 아버지께 말하고, 아버지도 고함 아닌 고함을 치면서 이야기를 하기에 웃으면서 부드럽게 "두 분은 왜 만날 싸우세요, 그만 싸우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게 매우 서운하셨던 모양이더라고요. 다음 날 어머니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 무슨 일 있냐고 물었더니 "너희들이 너네 아빠랑 싸운다고 하는 소리도 듣기 싫고 너네가 나랑 너희 아빠랑 같은 취급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집을 나가려고 한다. 너희 아빠가 안 나가지 않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후로 어머니와 불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매우 가부장적인 분이세요. 어릴 때는 주로 일기를 안 썼다, 어른들께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아버지께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 존재 자체를 매우 두려워했어요. 저와 동생이 아버지의 기분이 어떤지 알려주는 수신호 같은 것도 만들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면 아버지의 차가 있는지, 집에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면서 아버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아버지도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 방법을 모를 뿐이지 저희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에 반해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은 편입니다.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도 아버지와 비슷하게 사이가 어색하고 편한 존재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제 공부를 열심히 뒷바라지해주며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가끔씩 저를 뒷바라지해준 어머니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힘들 때도 있긴 합니다.
저는 어른이 됐지만 부모님이 헤어지면 영영 우리 가족이 같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여전히 많이 불안해요. 부모님이 서로 싫어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 괴롭게 합니다. 부모님과 어렸을 때 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를 이렇게도 힘들게 하는 가족인데 '그래, 이럴 거면 얼굴도 보지 말고 살자'라는 마음보다 왜 이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정수현(가명·26·취업준비생)
수현씨, 부모의 다툼과 이혼이 어린 자녀한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죠. 어린 자녀가 부모의 불화에 괴로워하고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수현씨는 지금 성인인데도, 부모의 불화에 힘들어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수현씨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이들도 다 컸는데, 두 사람이 붙어 살면서 그렇게 맨날 싸울 거면 그냥 떨어져서 편하게 지내시라고 하는 게 더 낫다'고요. 하지만 지금 수현씨는 그러지 못해요. 부모님이 다시 헤어질까 봐 매우 걱정하고 있지요. 수현씨는 왜 성인이 돼서도 부모님 두 분 관계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걸까요.
수현씨는 스스로가 부모님과 애착이 잘 형성되지 못한 것 같다고 했어요. 애착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는 것을 '애착'이라고 합니다. 애착은 사람은 물론 개, 고양이 같은 동물과의 관계에서도 형성될 수 있어요. 애착의 대표적인 예는 생애 초기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인데, 아기와 엄마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와 맺는 애착은 생존하기 위한 본능이에요. 아이가 울거나 보채거나 가까이 다가올 때 부모가 한결같이 민감하게 반응해주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기, 웃어주기, 안아주기, 사랑의 숨결이 느껴지게 가까이 있기 등 따뜻한 스킨십이 지속된다면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수현씨는 부모와의 애착이 잘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불안정 애착'의 모습이 보여요. 수현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어머니와는 어색했다고 표현해요. 가깝지 않고 밀착된 교류가 많지 않았다는 거죠. 부모가 자주 다투거나 큰 소리가 오고가면 어린 자녀들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요. 보살핌을 받고 싶고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위안을 받으려고 다가갔는데 위안은커녕 부모가 화를 내고 때린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아이는 어쩔 줄 몰라서 혼란에 빠지겠지요. 또는 자기 기분이 좋을 때는 아이를 다정하게 대해주고 배우자와 사이가 나쁠 때는 자식한테 짜증내고 화를 낸다면 아이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이처럼 일관된 양육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경우, 자녀는 불안정 애착 중에서도 '집착형 불안정 애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안정 애착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요, '무시형' 애착은 곁에 사람이 있는 것을 불편해하지만 집착형 애착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혼자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누군가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대해 견디기 힘들어해요. 미운 부모라도요. 어린 아이들의 분리 불안처럼 부모한테 집착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수현씨 내면에서도 그런 양상이 보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무섭고 싫었는데, 지금은 또 부모를 과도하게 이해하는 두 가지 마음이 다 있는 것 같아요. 부모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경우인 거죠. 이런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불신, 불안감이 큽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잘 지낼 때도 못 믿겠고, 불안하죠. '저러다 언제 또 돌변할지 모르겠다' 이렇게요.
수현씨 어머니가 '싸우지 말라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도 이 때문으로 보여요. 수현씨 마음속에서 '자기들은 끊임없이 부정적 감정을 나한테 쏟으면서, 내가 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했더니 발끈하면서 나를 거절하고 버리고 가려고 하네'라는 마음이 드는 거죠. 수현씨 마음 저 깊은 구석에서는 엄마를 좀 종잡을 수 없다는 불신, 엄마와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수현씨는 특히 부모가 서로의 험담을 자신에게 하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험담을 하는 건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니까 부모의 이혼을 걱정하는 수현씨에게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아요.
수현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다고 했어요. 물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릴 권리는 없지요. 심지어 부모라도요. 세상에 '맞을 일'이라는 건 없지만, 수현씨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는 이유는 '애들 키우면서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때릴 때가 있어요'라는 것에도 해당이 안 되는 이유들이에요. 아이들 자신도 조금이나마 잘못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들이죠. 아버지는 자기 삶의 어려움을 아이들한테 화풀이했던 것 같아요.
수현씨는 그런데도 이런 아버지를 너무 쉽게 이해해줍니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긴 했지만, 사정이 있었어. 나를 사랑해'라고요. 마음속 깊은 구멍이 있지만, 이 위를 모래로 살짝 덮어두는 거죠. 사연을 보면 수연씨는 천성이 착하고 굉장히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부모와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묻어둬도 되는 건 아닙니다. 부모를 미워하고 흉보라는 말이 아니에요. 지나치게 빨리, 성급하게, 이해하지 말라는 거지요.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나 어려움을 직시하는 과정이 빠져 있어요. 건강하지 않은 해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현씨에게 부모님이 아주 적나라하게 상대방의 험담을 해요.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서요. 제가 보기에 그럴 때마다 그동안 외면했던 그 구멍, 수현씨 내면의 두려움, 억울함, 분노, 적개심 같은 감정이나 기억이 건드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수현씨는 상대방 험담이 듣기 싫은 걸 떠나, 너무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거지요.
과거 겪었던 아픔을 덮어두기보다는 제대로 직면하고 직시해 봐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현씨는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성인이 돼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불화와 부모님과의 불화로 인해 느꼈던 두려움, 불안이 막연하게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저는 수현씨에게 희망적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부모가 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한 적이 많았어도 부모가 왜 그렇게 나를 대하고 키웠는지를 알아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갈 수 있어요. 이를 노력해서 얻는 안정형, 즉 '획득한 안정형'이라고 합니다. 불안정 애착을 형성했다 하더라도 노력하면 후천적 안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지요. 먼저 어린 시절 애착 패턴을 형성하게 된 양육자 부모와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전기 작가의 입장으로 적어 보세요. 수현씨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라 '○○○씨'라는 인물에 대해 적는 과정은 한 인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수현씨도 부모와의 관계에서 당신이 받았던 영향을 적어 보시길 권합니다. 마주하기를 두려워 말고 어린 시절 느꼈던 공포스러웠던 경험을 떠올려 보고 어두운 감정을 솔직하게 써 보는 겁니다. 수현씨에게는 부모님의 어떤 말과 행동이 지금 내게 어떤 마음을 자리잡게 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수현씨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직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요. 부모의 불화가 수현씨를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못하도록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힘들겠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결국 본인 자신입니다. 수현씨가 이 과정에서 꼭 기억해야 할 건 부모님의 인생과 본인의 인생은 독립된 별개의 것이라는 거예요. 어머니와 나는 가까운 사람이지만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도 내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미성숙함도 내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중요한 대상이지만 아버지와 나는 삶의 가치관도 다르고 감정의 처리 방식도 다릅니다. 부모님 인생은 부모님 것이고, 수현씨 인생의 주인은 수현씨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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