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2018년 5월 22일, 미국 워싱턴 DC 하늘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먼 타국 땅에서 조선의 공관원으로 근무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종손 이상구씨가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하 공사관)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이 장면은 공사관 개관식의 하이라이트로 기억된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방치되어 있던 공사관이 1910년 단돈 5달러에 강제 매각된 지 108년 만의 일이었다.
나라 잃고 5달러에 매각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조선의 외교공관이었던 공사관이 왜 5달러에 매각될 수밖에 없었을까. 심지어 2만 5,000달러의 거금을 들여 매입한 건물이었다. 당시 공사관 건물 매각은 기록된 증서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거래 문서상으로는 소유자인 고종이 1910년 9월 1일 주미일본대사에게 공사관의 소유권을 5달러에 넘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직후에 국권 상실과 함께 강제로 공사관의 소유권도 넘어간 것이다. 당시 을사늑약에 대한 서명을 거부했던 고종은 공사관 매매의 승인도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일본은 공사관 건물을 넘겨받은 당일 미국인에게 공사관을 매각해 버린다. 여러 간섭 속에서 어렵게 개설된 자주외교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사실 공사관 개설 역시 순탄치 않은 과정들의 연속이었다.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었으나 청나라의 간섭 등으로 곧바로 주미공사를 파견하지는 못했다. 고종이 의지를 굽히지 않자 청은 ‘영약삼단(?約三端)’을 제시했고 이를 이행하는 조건으로 박정양 초대공사가 파견되고 이듬해에 외교공관을 설립하게 된다. 우여곡절 속에서 자주외교의 염원을 갖고 마련된 공간이 공사관이었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기까지 16년간 자주외교의 공간이자 조선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외교활동이 전개된 현장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공사관은 단순히 건물이 아닌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매각된 후 공사관 건물은 미국 내 여러 소유자를 거치며 떠돌았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미군의 레크리에이션 센터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는 화물운수노조의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개인 소유의 가정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공사관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은 사실 계속되었다. 한국 언론은 지속적으로 이 빼앗긴 공간에 대해 보도했고, 재미한인사회 역시 성금을 모금하는 등 공사관 매입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10월 공사관 매입계약을 성사시켰고, 일제에 공사관을 빼앗긴 지 102년 만에 되찾게 된다.
되찾기 노력 끝에 108년 만의 재개관
문화재청은 공사관을 매입한 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하 재단)과 함께 본격적인 보수 및 복원 공사에 착수했다.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잃기까지 16년간 자주외교의 무대였던 공사관의 그 당시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철저한 조사와 고증작업이 진행되었고, 2013년 4월 정밀실측을 시작으로 복원 및 활용 설계, 보수 및 복원 공사, 전시물 제작 및 설치 등 과거를 되살리기 위한 쉽지 않은 여정이 시작되었다.
백악관 북동쪽 로건서클 1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공사관은 지상 3층과 지하 1층으로 구성된 연면적 578㎡, 건축면적 150㎡ 규모의 건물로 대한제국의 재외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단독건물이다. 또한 이 지역은 1972년에 역사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 국가등록문화재로 보호·관리되고 있다.
외국의 역사지구 내 등록문화재 건물을 매입하여 문화재 복원의 방식으로 현지에서 공사를 진행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에, 계약방식 및 내용 등 어떠한 참고할 만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답이 없는 수학 문제에 여러 가지 공식을 대입해 답을 찾아나가듯, 국내외 흩어져 있던 관련 자료들을 한데 모으고 국내외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우선 공사관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건물 자체의 보수 및 복원 공사는 물론, 그 당시 외교현장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통한 재현품의 구매, 제작 및 설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사관 외관의 경우 1877년 건축되었을 당시의 빅토리안 양식을 기반으로 그 시대에 맞게 복원하고, 1층과 2층은 원형복원을 기본으로 하되 1층은 객당, 정당, 식당 등으로, 2층은 공사 집무실, 서재, 침실 등으로 재현하여 그 당시의 모습을 찾도록 하였다. 또한 3층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큰 방향을 잡고 공사가 추진되었다.
보수ㆍ복원 과정 중 150년 전 카드 등 발견…당시 활동상 읽혀
미국 현지 공사 방식, 재현을 위한 고증, 국내법에 따른 예산 집행 등 산적한 문제들이 서로 충돌하며 돌파구가 없을 것 같은 900여 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공사관 복원 사업에 투입된 10명의 담당자들의 열정과 국내외 건축, 전시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수공사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자료나 흔적도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 공사관 매입 당시에는 벽체에 가려져 알 수 없었던 하인용 계단을 1층 벽면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발견했고, 2층 벽난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는 120년 전의 결혼식 안내장, 크리스마스카드, 신년 카드 등 15점의 자료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이들 발굴 자료는 초청 주체, 수신 및 발신 주소 등이 모두 남아 있어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의 결혼식(1906년 2월 18일) 안내장임을 알 수 있는 등 당시 공사관의 생활상과 활동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보수·복원 공사를 통해 공사관이 되찾고자 했던 얼굴은 무엇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단언하건대 주변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지켜내고자 했던 자주외교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담당자들의 발품으로 발굴한 사료들이 없었다면 자주외교 역사의 재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워싱턴 DC 내 국립문서보관소, 버지니아 주립대학교, 워싱턴 DC 도서관, 의회도서관 등에서 1889년 현 건물에 입주한 일자를 확인할 수 있는 국무부 문서, 공사관 내외부 모습을 담고 있는 잡지 등의 사료를 추가로 발굴했고, 또한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주미내거안(駐美來去案)’에 수록되어 있는 수리견적서, 물품명세서 등 관련 공문서를 철저히 분석해 1900년 당시 공사관 건물의 각방 명칭 및 용도, 방별 비치된 물품을 확인하였다.
2층은 업무 공간으로 3층은 공관원 숙소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지하는 세탁실, 당구실 등 관리 및 휴식 공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층은 1893년 당시 촬영한 사진을 근거로 원형을 최대한 복원할 수 있었지만 2층 공간은 방별 용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공문서나 물품대장에 적힌 목록들이 없었다면 재현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렵게 복원의 근거를 발견했지만 더 큰 난제는 사진과 공문서, 물품대장 등을 근거로 선정된 232개의 물품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물리적 복원이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들과 역사를 다시 되찾는 과정이었다. 당초 예상했던 7개월의 과업기간은 4차례의 변경을 통해 1년 5개월로 연장되었다. 232개의 물품 중 어느 하나도 쉽게 제작되거나 우연히 찾아낸 경우는 없었다. 당시 워싱턴 외교가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카펫을 제작하기 위해 디자인을 일곱 차례 변경했다. 샹들리에의 경우 우여곡절 끝에 1893년 촬영한 공사관 내부 사진과 유사한 엔틱 제품을 구입하여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재의 위험으로 제작을 결정했다. 한진사태로 인한 해상 운송 결항으로 운송 일정이 지연되고 운송 비용이 계속해서 증가했다. 운송대란으로 미국으로 보내지 못한 고가구 및 장식품들은 별도로 창고를 임대해 보관해야 했고, 미국으로 어렵게 보낸 물품도 워싱턴 D.C. 당국의 미숙한 행정절차 및 복원공사의 지연 등으로 공사관 건물 내로 반입하여 비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계약기간의 연장은 불가피했으나 업체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더 이상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업체는 수차례 사업 중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해외에서 최초로 진행한 자주외교 공간의 복원이라는 사명심과 자긍심으로 힘겨운 300일을 버텼고, 마침내 2018년 3월 12일자로 공사관 준공 허가가 떨어졌다.
우리 품에 돌아온 공사관, 과거ㆍ현재 돌아보는 계기 되길
자주외교의 상징이자 한미우호의 상징인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우리 품에 돌아온 지 내년이면 10년째를 맞는다. 보수·복원을 거치고 개관한 지 3년이 지났다. 개관 이후 한해 방문객이 약 1만 명에 이를 정도로 현지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 여행 등을 통해 공사관을 방문한 국민들이 남긴 방명록에는 공통되는 내용들이 있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알 수 없는 뭉클함과 뿌듯함을 느꼈다.”
코로나19 시국이 끝나고 미국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공사관 방문을 권하고 싶다. 조선과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자국의 자주외교를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던 외교 공간,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던 대외 교류 창구의 공간, 국가를 잃은 동포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자주독립의 상징적인 공간, 이 공간을 통해 선조들의 치열한 삶과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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