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코로나 대확산' 韓기업 생존기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 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한국일보>
"호찌민에 못 들어옵니다. 방법이 없어요."
지난달 중순 식품 원자재 운송팀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런 말을 듣는 순간, 한국 식품기업 A사의 물류책임자는 망연자실했다. 당시는 물량 확보에 또 실패할 경우, 생산 라인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평소 100만 동(약 5만 원)만 쥐여 주면 슬쩍 진입을 눈감아 주던 베트남의 공안마저, 당시 일일 확진자 6,000명을 웃돌던 호찌민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무서웠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코로나19 음성 확인서가 있는 호찌민 내 운전기사를 수배, 시 경계에서 차량을 인도받아 공장으로 트럭을 겨우 끌고 갔다. 그러나 며칠 뒤, 두 배의 물류비를 감수한 '운전기사 바꾸기' 전략도 당국에 의해 전면 금지됐다. 11일 현재 A 기업의 생산 라인은 대부분 멈춰 섰다.
건설자재 생산·판매기업인 B사 상황은 더 복잡하다. 호찌민 공장에선 사전 비축 물량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상품을 생산하지만, 이를 판매할 방법이 없는 탓이다. 실제로 호찌민은 지난달 9일 이후 비필수 인력의 이동이 전면 통제되면서, 신규 계약은 물론 기존 물량의 도심 내 배송마저 어려운 상태다. 그렇다고 생산을 중단하기도 난감하다. 상황 호전 시 즉시 공장을 재가동하려면, 오도 가도 못 하는 공장 내 생산 인력을 계속 유지하면서 정기적으로 코로나19 검사도 받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업 불가에 인건비 폭증까지 겹친 B사는 지난달 전년 대비 40% 이상 매출이 급감했다.
1990년대 베트남에 처음으로 공장터를 닦은 '1세대 기업들'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현지 진출 27년 차인 봉제기업 C사는 지난달 중순 생산을 잠정 중단했다. 작업 특성상 종업원들이 서로 붙어서 일하는 게 불가피한 만큼, 코로나19 집단감염의 온상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C사보다 소규모인 한국 중소기업 수백 곳의 피해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C사 노무 담당자는 "국제통화기금(IMF), 리먼브러더스 사태 당시엔 물량을 조정할지언정, 생산라인은 돌리면서 버텼다. 뭔가를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게 하는 이런 경영난은 살다 살다 처음"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당장 현지 사업장을 정리하고 떠날 수도 없다. 비슷한 인건비와 경영 환경을 갖춘 나라들은 베트남보다도 상황이 나쁘다. 중국은 미국과의 갈등 여파로 수출입 이점이 떨어지고, 인도와 태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감염병 확산세가 더 심각하다. 심지어 '제2의 베트남'으로 불리던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로 국가 기능마저 마비됐다. 그대로 남자니 버틸 재간이 없고, 떠나자니 선택지가 없는 '최악의 시간'이다.
"韓기업 살려야 우리도 산다" 베트남의 안간힘
한국 기업의 악전고투를 바라보는 베트남 정부의 표정도 자못 심각하다. 현지 수출의 25%가량을 담당하는 한국 기업이 무너지면 베트남은 경제 기반이 흔들리는 것은 물론, 100만 명이 넘는 자국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잃는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관광산업이 붕괴돼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베트남 입장에선 상상도 하기 싫은 미래다. 여기에다 현지 적응도가 가장 높은 한국 기업이 철수할 경우, 다른 글로벌 기업들의 연쇄 탈출도 불을 보듯 뻔하다. 경제 파트너인 한국 기업을 챙기는 건 그들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다.
베트남 정부는 실제로 가용한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코트라) 베트남 하노이 무역관에 따르면, 중앙정부는 최근 한국 기업을 향한 각종 기금과 세금의 면제 및 유예·지연 납부를 허용했다. 우선 한국 기업은 내년 6월까지 고용 직원들의 노동 재해 및 업무상 질병에 대한 사회보험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직원이 15% 넘게 줄어든 기업은 신청일 기준으로 6개월간 퇴직 및 유족 기금 납부가 유예되며, 직원 50% 이상이 근무할 수 없는 경우엔 추가로 노동조합기금의 지불도 미뤄진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봉쇄령이 발동된 지역 내 한국 기업은 세금 신고 및 납부를 연기할 수도 있다. 회사의 열악한 현실을 소명할 땐 각종 세금 신고 및 납부 지연에 대한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고, 봉쇄 해제 시까지 말미를 두기로 베트남 국세총국이 결정한 것이다. 금융권에서도 인건비 증가로 경영난에 빠진 한국 기업을 위해 향후 1년 동안 무이자로 운영 자금을 대출해 준다. 다만 유급 휴직 직원들의 급여 지원 목적에 한정되며, 단일 최대 대출 액수는 휴직 직원 전체의 3개월치 임금 총액이다.
한국 기업 소속 노동자들의 근무 연속성 보장을 위한 직접 지원도 진행된다. 유급이 아닌 무급 휴직자가 생활고를 이유로 한국 공장 재출근을 포기하고 귀향하는 것을 베트남이 먼저 막아 주겠다는 취지다. 이와 관련,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는 1개월 미만 무급 휴직자에게 185만5,000동(약 9만3,000원), 1개월 이상 무급 휴직자에겐 370만 동(약 18만6,000원)의 생활보조금을 각각 일괄 지급할 계획이다. 만약 무급 휴직자가 임신 중일 경우엔 100만 동(약 5만 원), 가족 중 6세 미만 자녀가 있을 경우에도 한 명당 100만 동이 추가 지원된다.
'9월 말 극복' 시나리오 현실화만이 살길
베트남의 배려는 물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까지의 지원책은 경영난을 조금 더 버티도록 돕는 '보조 배터리' 성격이 짙다. 위기 극복의 주동력은 결국 수출 산업의 혈관인 물류를 베트남 측이 뚫어 주는 데 있다는 얘기다. 장기적으로는 한국 기업 인력에 백신을 접종해 주는 것도 필수 과제다. 지연되고 유예된 위기는 언젠가 터지는 법이고, 본질적 문제 해결 없이는 혼란만 반복될 뿐이다.
한국 기업들은 관망이 아닌 돌파를 택했다. 총대는 하노이 한인상공인연합회(KORCHAM·코참)가 멨다. 이달 8일 팜민찐 총리 주재로 열린 전 부처 및 63개 시·성 최고책임자와의 비상 대책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실질적 대책을 직접 요구한 것이다. 홍선 코참 부회장은 베트남 국영방송에 의해 전국에 생중계된 현장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적체된 통관 업무로 원부자재 공급난이 심각하다"며 "부품 조달 체계를 서둘러 확립해 제조업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한국기업 종사자들에 대한 신속한 백신 접종을 재차 부탁한 뒤 △마비된 기업 행정 절차의 원활한 진행 △한국인 단기 투자·전문인력 입국 시 격리 면제 즉각 실시 △노동허가서 지연 발급 개선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베트남 정부는 수긍하면서도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 측의 '직언'이 정답이라는 건 알지만, 물류와 백신, 입국 문제는 전염병이 어느 정도 잡혀야만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열악한 의료 시설 탓에 시스템 방역이 어려운 베트남 입장에선 막힌 물류 흐름을 뚫을 경우 발생할지 모르는 감염병 추가 확산을 감당할 자신이 아직 없다. 1,800만 회 접종 분량밖에 얻지 못한 백신은 9일부터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일 확진자 수 1만 명대' 진입을 앞두고 있던 터라, 특별입국 확대 실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결국 다시 돌고 돌아, 베트남 방역 역량의 문제라는 얘기다.
현지 보건당국은 호찌민 등의 집단감염 사태를 9월 말까지 잡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산발적 감염 사례가 지속된다 해도, 베트남 정부가 기업 활동만큼은 재허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현지의 전망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올 2·3분기 수출이 급감한 상황에서 연말 공급 물량까지 맞추지 못한다면, 내년도 경제 성장을 기약할 수 없어서다. 블랙 프라이데이와 크리스마스 시즌이 이어지는 4분기는 베트남 중개 무역의 최대 이익이 창출되는 시기다. 한국 기업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고통을 동반할 두 달의 시간. 이날들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양국이 함께 극복해 낸 성공의 역사로 기록될지, 쇠퇴의 시작점이 될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건 한국 기업과 베트남이 맞잡은 손을 더 꽉 쥐어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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