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한국일보>
"이 책은 페미니즘 관점으로 정치 이론을 다룬 책이지, 여성에 대한 책은 아니다."
웬디 브라운의 '남성됨과 정치' 첫 문장이다. 책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성적 분야인 정치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평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시작부터 곤란에 봉착했다.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남성 됨(manhood)과 정치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정치 이론에서의 여성이나 여성 정치 사상가 같은 '여성 문제'를 다루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영화 이론을 공부해 온 나 역시 이런 오해를 종종 만난다. 남성중심적 비평이 지워버린 여성을 복권하고 여성 영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건 물론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것만이 페미니스트 영화 비평의 전부는 아니다. 이런 협소한 이해는 곧 “페미니즘은 부분만을 다루고 있으므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니 하지 말아라”라는 몰지각한 배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1980년대 미국에서 브라운이 경험한 고충은 30년이 훌쩍 지난 태평양 건너 이 땅에서도 쉽게 이해된다.
브라운은 강조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것이고, 페미니즘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간, 즉 남성에 관한 것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문제라고. 그의 연구는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고, 이런 식의 의도적인 이분법을 해체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어떻게 서구 역사 안에서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상상력이 남성 됨을 구성하고, 동시에 남성 됨의 조건과 성질들이 정치를 규정해 왔는지 살핀다. 페미니스트 문제틀로서 젠더란 성적 차이의 실체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이자 프레임인 셈이다.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을 짧은 칼럼 안에서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한 남성 국회의원이 여성 국회의원에게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했던 황당한 장면은 참으로 유구한 역사 속에서 등장했으며, 정치와 남성 됨이 맺어온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브라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를 ‘폴리스-남성-정신’과 ‘오이코스-여성-신체’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삶을 생산하고 지속하는 신체와 노동을 여성 됨으로 묶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해 버렸다. 그리고 이런 이분법은 타자를 설정하고 스스로를 초월적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남성 됨을 구성하고 유지하고자 했던 이후의 정치 철학자들에게도 쭉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고대)-마키아벨리(중세)-베버(근대)로 이어지는 계보학 안에서 정치는 인간의 그 어떤 활동보다 남성적 정체성에 강하게 기대는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운은 "공적 영역에서 남성적 가치를 '여성적 가치'로 교체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역전"으로는 해방의 정치학을 상상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남성·여성으로 갈라치기하여 젠더를 구성해 온 방식 그 자체다. 브라운은 "인간은 복잡하고 긴장이 가득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생명체이고, 젠더는 결코 단순하거나 사소한 생물학적 '사실'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후로 여성 정치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남성됨과 정치'를 끝으로 '바로 본다, 젠더' 연재를 마친다. 그간 나누고자 했던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라,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책을 골랐다. 브라운은 정치란 한 개인이 선보인 딱 한 번뿐인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진정 우리 자신을 쏟아붓고, 그렇게 표상한 사랑이라는 긴 노동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썼다. '바로 본다, 젠더'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나에게는 페미니스트 사유를 경유해 동료를 발견하고 사랑하며 돌보는 노동의 시간이자 정치의 시간이었다.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허스토리'를 비롯해 최근 한국일보에서 만날 수 있는 눈부신 기획에 동료로서 지지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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