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이야기"에 끌린다는 시청자들
OTT로 문화 장벽 넘는? K드라마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Hospital Playlist)이 최근 공개된 '2021 글로벌 한류 트렌드'에서 미국에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 순위 3위에 올랐다. 현빈과 손예진을 커플로 이어준 '사랑의 불시착'(1위)과 '조선 좀비'란 신세계를 보여준 '킹덤'(2위)의 뒤를 이었다. 한국국제교류단이 미국 등 18개국 8,500명의 해외 한류 소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다.
북한, 좀비 소재도 아니고 한류 스타도 없는데
'슬의'는 같은 의대를 나온 99학번 동기 다섯 명을 중심으로 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미국 시청자들이 호기심을 보일 법한 북한('사랑의 불시착')이나 친근해할 좀비('킹덤')를 소재로 한 블록버스터 드라마가 아니다. 조지 클루니 등 스타 배우 산실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말까지 사랑받은 미국 의학드라마 'ER' 회당 평균 제작비는 1,000만 달러(117억 원). 한국 드라마 제작비의 15배를 훌쩍 넘는 자본을 들여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생생한 의료 현장을 구현하는 미국은 의학 드라마 왕국으로 통한다. 미국 TV 역사상 최장수 의학 드라마인 '그레이 아나토미'(2005~) 등은 세계 의학 드라마의 교과서로 불렸다. 이런 의학 드라마를 보고 자란 미국 시청자들이 왜 한류 스타도 나오지 않는 '슬의'에 관심을 보이는 걸까.
"좋은 직업 윤리" "아름다운 우정" 국경 넘은 판타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멜씨는 '슬의' 시즌2 본방 사수족이다. 12일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OTT)인 넷플릭스에 8회가 올라온 날,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겨울(신현빈)이 남자친구인 정원(유연석)의 엄마 병문안을 하러 갔다'는 드라마 관련 내용이 잇따라 올라왔다. 멜씨는 '슬의'의 인간적인 이야기에 끌렸다. 본보와 SNS로 만난 그는 16일 "내가 병원에서 혹은 일상에서 겪었을 법한 아픔을 현실적으로 다뤄 공감이 가고, 그런 접근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며 "미국에서 여러 의학 드라마를 봤지만, '슬의'는 내 추억과 감정을 더 쉽게 건드려 여러 번 봐도 쉬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의학 드라마지만 정겨워 '슬의'를 챙겨 본다는 얘기다.
'슬의'에선 흰 가운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종종 주인공이 된다. 하늘로 떠난 아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병원을 집처럼 드나드는 엄마, 그리고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아이를 둬 서로 고통을 보듬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주는 여운은 짙다. '슬의'가 응급 상황 묘사에 탁월한 미국 전통 의학 드라마와 다른 결로 주목받는 배경이다. 미국의 의사이자 유튜브 구독자 770만여 명을 보유한 인플루언서인 마이크씨는 구독자 요청으로 '슬의' 리뷰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엔 "'슬의'가 의학적으로 사실적인지가 내겐 중요하지 않다. 강요된 로맨스가 없고 좋은 직업 윤리, 아름다운 우정 등이 감동적"(Karina****), "'슬의' 보고 송화(전미도)가 운전할 때 들은 쿨의 노래('원 서머 드라이브')에 푹 빠져 유튜브로 계속 듣고 있다"(littlec****) 등의 댓글이 달렸다.
브라질 50대 여성이 최불암 팬 된 사연
OTT의 보급을 계기로 한국 콘텐츠 소비 지형도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OTT를 통한 다양한 한국 드라마 노출과 사용자 취향을 기반으로 한 추천 시스템이 문화권이 다른 해외 시청자와 한국 콘텐츠와의 접점을 넓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홍석경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 발표문 '글로벌 VOD서비스의 한류 영향력'(2020)에 따르면, 브라질 50대 여성은 최근 원로 배우 최불암의 팬이 됐다.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2011)을 우연히 보고 난 뒤 최불암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1%대 시청률로 방송 당시 국내에서도 본 사람이 극히 드물었던 드라마를 한국과 지구 정반대에 있는 남미의 중년 여성이 10년 뒤에 찾아보고 팬이 된 것이다.
"K드라마를 보면 내가 극 안에 있는 것 같아"
홍 교수의 발표문에서 해외 시청자들은 한국 콘텐츠의 두 가지 특성에 주목했다. 장르의 혼합과 디테일한 감정 표현이다.
프랑스 50대 넷플릭스 사용자 A씨는 "프랑스 드라마는 서스펜스면 서스펜스, 수사물이면 수사만 보여주는데 한국 드라마는 여러 장르가 균형 있게 섞여 있다"고 말했다. '이태원 클라쓰'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 등을 본 미국, 프랑스의 해외 시청자들은 "한국 드라마엔 미국 시리즈물에 비해 촬영 방식이 차가운 느낌이 덜하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극중 인물 중 한 명처럼 느껴진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밖에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라면, 한국 드라마는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느낌" 등의 의견을 냈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슬의' 등 한국 콘텐츠는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히 묘사하는 특별한 감수성이 특징"이라며 "각 캐릭터와 깊이 교감할 수 있는 신선한 이야기가 해외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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