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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15>노량진정수장~인천송현배수지 수도길
오늘은 '수도길'을 걷는다.
1910년, 수도로(水道路) 또는 경인수도(京仁水道)라 불리는 상수도 파이프 라인이 서울 동작구 본동 258-1의 노량진 정수장부터 인천 동구 송현동 23-62의 송현 배수지까지 놓였다. 인천 개항장에 한강물을 상수도로 공급하기 위한 설비였다.
인천은 백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물이 부족한 지역이다. '삼국사기'의 유명한 온조·비류 형제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내려와서 각각 한강의 동쪽 지역과 서쪽 바닷가 지역에 자리잡았는데, 비류가 자리한 미추홀, 즉 지금의 인천 지역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土濕水鹹)' 백성들이 살기에 힘들었다. 한편 온조가 자리 잡은 위례성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어서, 비류는 후회하다가 죽었고 비류의 백성들은 온조에게로 옮겨 갔다고 한다.
태생적 물 부족의 땅,인천
인천·김포·부천 등은 서해안과 한강 하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해안은 바다이고 한강 하류도 밀물 때는 바닷물이 한강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왔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는 민물이 부족하다. 그래서 서해안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노량진 부근의 한강에서 물을 끌어올려서 인천까지 보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에서 한강 물을 끌어올려 인천에 보내고 있다.
노량진부터 인천 개항장까지 상수도 파이프가 놓인 1910년 당시, 영등포부터 인천 개항장에 이르는 지역은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수도길이 깔린 지상의 도로 부분은 이 지역의 간선도로로서 기능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서울로 진격할 때 수도길을 따라갔고, 전쟁으로 서울 구도심이 파괴되자 대한민국의 수도를 수도길 한가운데인 지금의 인천 부평시장 근처로 옮기려는 논의도 있었다.
수도길에 놓인 상수도 파이프는 더 이상 상수도 시설로서 기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도길은 지난 백 년 동안 서울 영등포구·양천구, 경기 부천시, 인천 부평구 등을 관통하는 간선 도로로서 기능했기 때문에, 현재도 이들 지역의 공간 구조를 살필 때에는 수도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수도길의 출발지점인 노량진 정수장은 현재 본동시민공원으로서 모습을 바꾸었다. 공원 한켠에 세워진 '노량진 정수장터(1910~2001)'라는 제목의 비석에는 노량진 정수장의 연혁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1910 제1정수장 신설 / 1948 서울시가 인천시로부터 운영권 인수'. 즉 1910년부터 1948년까지 이 정수장은 경성·서울 속에 있지만 인천이 운영했던 것이다. 그래서 1927년에 간행된 여행가이드북 '취미의 조선 여행' 속의 지도에도 '인천 수도(仁川水道)'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수도는 사라져도 길은 남았다
노량진 정수장에서 출발한 수도길은 현재의 수도권전철 1호선 노량진역·대방역·신길역 라인을 지난 뒤, 식민지 시기에 도회지로 개발된 영등포역 앞 지역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1939년에 작성된 '시가지계획 영등포 토지구획정리계획 평면도'(국가기록원 소장)에는, 열찻길을 남쪽 경계로, 안양천을 서쪽 경계로, 여의도를 동쪽 경계로, 한강을 북쪽 경계로 하는 영등포 도심을 관통하는 수도길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영등포 구도심은 수도길을 중심으로 구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오늘날의 서울 양천구도 마찬가지다. 안양천을 건넌 수도길은 수도권전철 5호선 오목교역부터 목동역까지의 라인을 따라 목동 신시가지를 관통한 뒤, 신정중앙로가 되어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국회대로에서 한 번 끊긴다. 이 구간의 수도길은 양천구를 남북으로 나누며 공간을 구성하고 있음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회대로를 건넌 수도길은 강서구 화곡동과 양천구 신월동을 통과해 서서울호수공원, 옛 김포정수장으로 들어간다. 서서울호수공원 부근의 수도길에는 588번 버스의 종점이 있어서, 이곳은 '588 종점'(현재는 604번 종점)이라 불리며 서울시 서부의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김포정수장이라 불리던 현재의 서서울호수공원은 원래 김포군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노량진 정수장과 마찬가지로 광복 후 서울시가 이곳의 운영권을 인계받았다.0
이곳으로부터 서쪽은 경기 부천시이다. 김포정수장 서쪽의 고강동과 원종동은 예전에는 농업지대였는데, 김포정수장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수도길의 상수도 파이프에서 많은 물이 새 나오다 보니 언제나 농사가 풍년이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말뚝을 뺐다 닫았다 하면서 마치 수도꼭지 틀듯 자유자재로 논물을 댔다. 심한 가뭄으로 이웃 마을들이 모내기를 못할 때도 저수지도 없는 이 마을은 물 걱정 없이 모내기를 끝내곤 했다. 물이 콸콸 솟는 곳은 물웅덩이까지 생겨 마을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정도였다."
부천시에 들어선 수도길은 서북쪽으로 나아가 고강사거리를 지난 뒤 각도를 꺾어 잠시 동서로 수평을 이루며 나아간다. 이 구간에서는 부천제일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부천의 큰 시장 가운데 하나인 부천제일시장이 수도길 위에 놓여 있는 데에서, 수도길이 경인로, 경인선 철도, 경인고속도로와 함께 부천의 근간을 이루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천제일시장을 지난 수도길은 오정초등학교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오정초등학교 앞에는 수도길과 함께 1950년 이전에 신(新)수도길이 또 하나 놓였다. 부천 향토사학자 양경직 선생은 "당시 펌프 용량이 부족하여 곰달내고개를 넘지 못하고 배수관이 수시로 터져서, 1950년 이전에 산 밑으로 터널을 뚫어서 이곳에서 다시 양수(揚水)로 퍼 올려서 물을 넘겼다"고 설명한다. 양경직 선생이 만난 변창순(1937년생)씨는 "어려서 터널 안에 들어가 쌓인 진흙 청소를 자주 했다"고 증언했다. 현재도 오정초등학교 앞을 나란히 지나는 소사로794번 길과 소사로808번 길에서는 수도 시설용 토지임을 뜻하는 '수(水)'라는 지목(地目)이 확인된다.
오정초등학교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향하는 수도길은 다시 한 번 경인고속도로와 만난 뒤, 수돗길사거리를 지나 지금의 약대공원에서 일단 흔적을 감춘다. 이와 같이 부천에서는 두 개의 수도길이 모두 확인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1910년에 개통된 상수도 파이프의 실물도 발굴·전시되어 있고, 길과 교차로에도 수도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등, 수도길과 관련된 각종 자료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신도시가 밀어낸 수도길의 흔적
약대공원 부근에서부터 수도길의 흔적이 사라지는 이유는, 이곳에 제1기 신도시인 중동신도시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7년의 구지도에는 중동 들판을 관통하는 수도길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어서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동쪽의 여월동이나 작동 땅은 아직은 비어 있으며 서쪽의 중동 땅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평야는 주택지인 약대동까지 넓게 비집고 들어와 있는 그 논에 이어지는 평야이어서, 그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도시화되기는 어렵지 않다"('한국의발견 경기도' 부천시 편).
이렇게 해서 부천시에서 사라진 수도길은 인천 부평구의 부평중학교와 미군 기지인 캠프 마켓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뒤, 서쪽으로 산을 넘어 인천 구도심으로 향한다.
부평과 인천 구도심을 가르는 산을 넘어온 수도길은, 이제 옛 주안 염전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현재 이 지역은 모두 매립되어 공업단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길의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공단 즉 옛 염전 지역과 인천 재능대학교 사이의 길에서는 '수' 지목의 길쭉한 토지가 일부 확인된다.
주안 염전의 남쪽을 지난 수도길은 이제 최종 목적지인 송현 배수지를 향해 송림동을 지난다. 인천 동구의 송림로157번 길, 육송로44번 길, 샛골로194번 길, 샛골로193번 길로 이어지는 수도길의 송림동 구간은 1947년 항공사진에서도 뚜렷이 확인되며, 이 시기부터 길 양쪽에 들어서기 시작한 월남민·철거민·이촌향도민들의 크고 작은 주택은 오늘날에도 송림동 구간 수도길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달동네'가 가장 밀집해 있던 곳이, 수도길의 최종 목적지인 송현 배수지였다. 그래서 이곳을 재개발한 인천시는 이 지역의 옛 기억을 남기기 위해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개설했다.
박물관에는 이곳의 재개발에 반대하던 주민들이 작성한 팸플릿이 전시되어 있어서, 이 공간이 겪어 온 갈등 도시의 양상을 전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의 팸플릿은, 구한말에 설치된 송현 배수지의 웅장한 시설물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이 노량진 정수장부터 송현 배수지에 이르는 수도길을 걸으면, 지난 100년간 조선·한국 시민들이 살아온 모습을 경인선 철도, 경인선, 경인고속도로와는 다른 관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도길을 하루 만에 전부 걷는 것은 쉽지 않겠으나, 조금씩 산책 삼아 걸어 보면 흥미로운 발견을 많이 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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