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판 저자 서문, 한글 자막, 한글 이름, 한글 지명처럼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여 쓰는 일이 종종 있다. 한글 파괴를 우려하는 기사도 막상 열어 보면 대개는 한글 자체의 문제보다 한국어가 외래어에 오염되어 파괴되고 있다는 주장을 펼 때가 많다. 소리(음성언어)와 문자가 혼동되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영어와 로마자를 같은 의미로 섞어 쓰거나 일본어와 가나 문자를 혼동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유독 한글과 한국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몸처럼 인식된다.
일반적으로 한 (음성)언어와 한 문자의 결합이 필연적인 건 아니다. 하나의 언어가 여러 문자로 표기될 수 있고, 로마 문자처럼 하나의 문자가 여러 언어를 적는 데 쓰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글과 한국어의 관계는 다소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한글 이외의 다른 문자를 상상하기 어렵고,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고유한 문자체계이다 보니 한글과 한국어가 한몸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의 쓰임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면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한글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되레 외래 요소를 지나치게 경계하고 배제하는 태도로 확장되는 것이다.
한글이라는 뛰어난 언어를 가진 민족이 외래의 언어, 특히 영어를 무분별하게 수입하여 쓰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러다 한글 혹은 한국어가 곧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는 대개 한글이 곧 한국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글이 우수한 문자이고 또 한국어를 가꾸고 보존해야 하는 건 맞지만 외래어의 유입으로 우리 언어인 한글과 한국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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