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박지욱?신경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인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흥남철수의 그 흥남이네요?”
“흥남철수를 어떻게 알아?”
“학교 수업시간에 배웠겠죠. 그리고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금순아 울지를 말고… 맞죠? 저는 2절에 나오는 영도다리 건너 영도에서 태어난 걸요.”
“그래, 흥남이 그 흥남이지….”
어르신은 내가 A시에서 공중보건의사로 일했던 1990년대 말 환자로 처음 만났다. 외래에 오실 때마다 잘 치료해줘서 고맙다면서 내게 밥 한번 대접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환자로부터 밥을 얻어먹는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 환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싫었다. 그래도 어르신은 한사코 뜻을 굽히지 않으셨고, 나도 너무 거절만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싶어 마지못해 식사 초대에 응했다.
어르신께서는 시내에 있는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 메뉴 중에서 제일 비싼 꼬리곰탕을 사주셨다. 그 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르신이 실향민이란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어르신과 나는 외래에서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공중보건의 임기를 마치고 나는 A시를 떠났다.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A시로 돌아와 다른 병원에 취업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어르신이 찾아와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손자를 다시 보신 것처럼.
하지만 난 사정이 생겨 갑자기 A시를 떠나게 되었고 B시에 개원을 했다. 약 한 달이 지나고 어르신은 기어코 나를 찾아내셨다. 아무 연락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호통을 치실 정도로 서운해 하셨다. A시에 개원했으면 본인이 팍팍 밀어주었을 텐데 아쉽다고도 하셨다.
어르신은 나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격려해 주셨고, 나 몰래 개원 축하금까지 두고 가셨다. 그 때 얼마나 죄송스럽고도 고마웠던지. 이후로 어르신은 아예 다니던 병원을 내 병원으로 옮기셨다.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꽤 먼 거리였지만, 한 달에 한 번은 나를 만나러 오셨다.
그렇게 4년여가 흘렀다. 어느 날 어르신께서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오시더니 급히 진단서를 끊어 달라고 하셨다.
“진단서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갑자기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알아 보니까 북에 두고 온 내 외동딸이 살아 있대. 이산가족 상봉하려고 방북 신청 했어. 진단서를 첨부해야 한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꼭 만나 봐야지!"
“어르신 정말로 축하드려요. 얼른 써드려야죠. 그런데 혈액형 쓰는 난이 있네요. 어르신 혈액형이 어떻게 되죠?”
“기깐 것 모르는데….”
“그래요? 혈액형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
“안 돼, 오늘까지 꼭 제출해야 돼.”
큰일이었다. 내 병원에서는 검사가 안 되고, B시에 있는 종합병원에 가면 금방 할 수는 있겠지만 이 곳 지리를 모르시는 어르신더러 혼자 병원을 찾아 가시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병원 문을 닫고 내가 따라갈 수도 없고, 시외버스를 타고 A시의 종합병원으로 가시라고 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고....난감했다.
‘아, 맞다, 시청 앞에 헌혈차가 있지!’
어르신을 모시고 근처에 있는 헌혈차로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어렵지 않게 혈액형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진단서의 빈 칸을 다 채우고 A시로 가는 시외버스를 태워드렸다.
“박 원장, 고마워, 정말 고마워….”
어르신은 상기된 얼굴로 버스에 오르시며 내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눈 배웅을 했다. 맞다, 고향이 흥남 철수의 그 흥남이시랬지, 이산가족이셨구나. 이 날이 되도록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더구나 외동딸인데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정말 다행이네.
하지만 어르신의 방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말년에 신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두고 온 혈육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신 것 같은데, 큰 실망감은 이미 병약하신 어르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이후로 병원에 오실 때마다 생기를 잃은 얼굴로 “너무 늦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셨다. 너무 낙담하셔서 기력을 잃으실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따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원장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경황이 없어 장례도 다 끝나고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그렇게 속절없이 떠나셨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저버리셨다. 내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이래서 환자와 인간적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나 싶기도 했다. 나는 그 병을 미리 발견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르신이 떠나신 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지금도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면 신기하게도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가 떠오르며 어르신 생각이 난다. 뜨끈한 꼬리곰탕 기억도 나고, 평생의 한이었을 외동딸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되살아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의사란 이유로 받기만 하고, 어르신께 식사 한 번 대접도 못 했다. 내게 많은 걸 베풀어 주신 어르신, 부디 전쟁도 이산도 없는 곳에서 평안하시길, 그리운 외동딸과 언젠가 꼭 해후하시길 간곡히 빈다.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인이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뉴스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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