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결정 3개월 만에 수도 카불이 탈레반 정권에 함락되었다. 카불에서 날아오는 각종 뉴스는 현지의 급박함과 위기감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세대나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탈레반 정권하에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착찹하다.
전쟁이 없었으면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을 만큼 아프가니스탄은 꽤나 먼 나라이다. 이란, 파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중국에 둘러싸인 아프가니스탄은 내륙국이어서 육로로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끼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19세기에는 남하하는 러시아제국과 인도를 장악한 영국제국의 세력이 맞부딪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양 제국은 이 땅을 완충지대로 남겨두기로 결정했고,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주의 지배를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역사는 그리 평탄하지 않다. 20세기에는 소련군의 침공과 내전을, 21세기 초에는 미군의 침공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인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미국에 베트남전의 기억이 쓰라린 것처럼, 러시아에는 아프가니스탄전이 쓰라리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서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정했다. 당시 소련의 국제적 위상은 냉전 중에서도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그토록 고전을 면치 못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때 들어간 소련군은 10년이 지난 1989년에야 철수하게 된다. 1만5,000명의 소련군 사상자를 낸 후에 말이다. 윤도현 밴드가 번안해서 부른 혈액형이란 노래를 들어본 적 있는가? 원곡은 고려인 빅토르 초이(최)가 이끌던 키노라는 소련 록밴드가 부른 노래인데, 바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죽어간 소련 병사들을 기리는 곡이었다. 소련 병사들의 죽음은 의미가 있었을까? 소련군이 지원했던 친소 공산 정권은 소련군 철수 이후 3년 반을 버텼지만 결국 몰락했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은 그 배후조직인 알 카에다를 지원하는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지만, 결국 20년이나 지속되었다. 미국이 지원하던 아프간 정부는 미군 철수가 끝나기도 전에 카불을 빼앗기고 탈레반 정권에 권력을 이양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과 미국 모두와 싸워 이긴 유일무이한 국가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작금의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데자뷔 같은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경험에서 배웠어야 했다”라고 말하지만, 자국이 겪었던 실패를 미국도 겪게 되어서 내심 고소할지도 모르겠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만 해도 우호적인 미러 관계를 반영하듯 러시아는 미국에 아프가니스탄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최악의 미러 관계에 놓여 있는 현재의 러시아로서는 미국의 실패가 여과 없이 전 세계에 전송되는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러울 수 있다.
다른 한편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구소련 지역, 특히 이슬람이 강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고려하면, 러시아도 현 상황이 편하지만은 않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의 분쟁 및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현시점에서는 실용주의 외교 노선에 따라 탈레반 정권과도 대화의 통로를 마련하고 사전 협상을 해놓았기에 러시아는 차분히 사태를 관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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