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소녀 죽음 보도 후 6개월 추적>
사이버 괴롭힘 받다 극단 선택 10대
법원, 선고 전 가해자들 소년부 송치
형사처벌 피하고 소년보호처분 유력
전과 안 남아 미래의 삶도 영향 없어?
검찰, 소년부 처분에 반발 항고하기도
혜린 부모 "사과 한 번 없었는데" 눈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
성폭행 피해에도 이름과 휴대폰 번호까지 바꾸며 삶의 의지를 드러냈던 열여섯 살 혜린이. 하지만 무자비하게 자행된 또래 집단의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온라인에서 특정인 대상 집단적·지속적·반복적 모욕·따돌림·협박 행위)과 오프라인에서의 2차 가해로 잊으려 했던 상처는 덧나고 말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혜린이는 이불을 품에 안고 그 높은 곳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혜린이의 비극’(관련기사 ☞[단독] 이름·번호 바꾸며 삶에 의지 드러냈는데... 가해자 선고 직전 극단 선택)이 지난 2월 한국일보 보도로 알려진 지 반년이 지난 지금, 혜린이가 죽음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비뚤어진 세상은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한국일보가 첫 보도 후 6개월 동안 혜린이 사건의 이면을 계속 추적한 결과, ‘혜린이의 비극’은 끝나기는커녕 더 큰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혜린이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아 기소된 '사이버 불링' 2차 가해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기 직전 소년재판부로 송치돼 형사처벌을 면했다.
법원의 선처로 혜린이 가족은 가해자들이 어떤 처분을 받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대한민국 법은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검찰, 성폭행 피해자 조롱 가해자들에 분노
한국일보 보도 후 인천지검은 혜린이를 괴롭힌 10대 또래인 A양과 B군을 공갈 및 명예훼손, 폭행, 협박, 모욕 등 혐의로 지난 2월 말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가해자들을 가정법원 소년부가 아닌 형사재판부로 넘겨 정식 재판을 받도록 했다. 현행법상 만 14세 이상 만 19세 미만 ‘소년’은 수사기관 또는 법원 판단에 따라 형사처벌과 소년법상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다.
검찰이 A양 등을 형사재판에 넘긴 이유는 혜린이에 대한 2차 가해가 소년부에서 교화·개선할 수 없을 정도로 죄질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형사처벌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A양과 B군의 공소장에 따르면, 혜린이와 알고 지내던 A양은 지난해 9월 25일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혜린이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처럼 허위사실을 올렸다. A양은 혜린이가 전학하려고 하자, 학교 부근에 사는 또래에게 “원래 XXX인데, 이미지 세탁할라고 이름 바꿈. 애들한테 소문 좀 내줘. 니네 동네에 걸레 한 명 갈 꺼야”라고 말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름까지 바꾸고 전학을 준비하던 혜린이의 신상과 피해사실을 들춰내며 조롱거리로 삼은 것이다. A양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또래 집단이 보는 가운데 우산으로 혜린이 머리를 내리치고 뺨을 때리는 등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혜린이를 괴롭히는 데 가담했던 B군 역시 혜린이가 숨기고 싶어했던 성폭행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B군은 지난해 9월 24일 혜린이와 혜린이 남자친구가 함께 있는 채팅방에서 혜린이 남자친구에게 ‘(혜린이랑) 잘 때 조심해. 강간으로 신고 당해’ 등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이 모든 일들이 혜린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사흘 동안 벌어졌다. 검찰은 결심 공판에서 A양과 B군에게 각각 장기 4년 6월~단기 4년과 장기 2년~단기 1년 6월을 구형했다. 법적 심판을 받기 위해 남은 건 법원 선고뿐이었다. 혜린이 부모도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재판부, 가해자들 선고 앞두고 돌연 소년부 송치
하지만 재판부는 가해자 선고를 불과 8일 앞둔 지난 5월 18일 A양과 B군을 돌연 법원 소년부로 송치했다. 선고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송치 결정문에 적힌 재판부 주문 내용은 '피고인들을 인천가정법원 소년부에 송치한다'는 한 문장이 전부였다. 소년부 송치를 결정한 이유로 '피고인들이 소년법 제2조의 소년(19세 미만인 자)으로서 보호처분에 해당할 사유가 있다고 인정된다'는 내용이 덧붙여 있을 뿐이었다. 이번 사건을 잘 아는 법조계 관계자는 “재판부가 A양과 B군이 전과기록이 없고, 초범이며 반성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형사재판과 달리 소년부 재판은 처벌이 아닌 교화가 목적이다. 처분 수위 역시 형사처벌에 비해 상당히 낮다. 소년법 제32조에 따르면 유죄가 인정되면 가정·학교 위탁 교육 또는 봉사활동 등의 보호처분을 받거나 소년원에 송치되는 1~10호 보호처분이 내려진다. 가장 무거운 처벌을 내린다는 보호처분 10호도 2년 소년원 송치 결정이 최대 처벌 수위다.
A양과 B군은 진즉에 소년법에 따른 보호처분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이들은 혜린이가 응급실로 실려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시간에도 페이스북 단체 채팅방에서 '혜린이 패고 걍 신고 빨릴래(당할래)' '혜린이 좀 맞아야 됨' '이번에 또 일 터져서 신고 당하면 보호처분 6호'라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기존 법망을 비웃으며 재판부의 소년부 송치 결정을 이미 예정된 수순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검찰, 소년부 결정에 반발 장문의 항고장
가해자들이 혜린이를 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 없는데도 소년부 송치 결정이 나오자, 검찰은 재판부 결정이 부당하다며 지난 5월 25일 법원에 항고장을 제출했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A양과 B군에 대한 인천지검 항고장에 따르면, 검찰은 피고인들이 혜린이에게 저지른 범행의 죄질과 범행 동기 등을 비춰볼 때 이들에게는 교정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내다봤다.
9페이지 분량의 검찰 항고장 전문을 살펴보면, 검찰은 A양에 대해서는, 욕설과 협박으로 혜린이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돈까지 갈취한 것까지 모자라 학교 내 다른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혜린이의 인격을 짓밟았다고 밝혔다. B군에 대해서는, 혜린이 남자친구로부터 혜린이를 성추행한 사실이 있는지 추궁 당하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혜린이가 과거 남자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성폭행으로 신고했다는 허위사실을 적시해 2차 가해를 유발했다고 적었다. 이처럼 혜린이를 향한 가해자들의 행태는 소년 범행으로 보기에는 매우 악랄하다는 게 검찰 판단이었다.
검찰은 특히 피고인들이 혜린이 유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혜린이 부모 역시 피고인들을 엄벌에 처해달라고 탄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수사기관에서 이들이 보여준 불성실한 진술 태도 역시 범행을 진지하게 뉘우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A양과 B군이 형사처벌이나 소년보호처분 전력이 없다고 해도, 이들의 범행 자체가 매우 중대하고 혜린이는 극심한 고통을 겪다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 점을 고려해 일반 형사사건 절차에 따른 처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회복되지 않는 슬픔 속 부모는 통곡 좌절
혜린이 부모 역시 재판부의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혜린이 아버지는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들의 행동이 교화와 개선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재판부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이 세상을 등진 딸과 평생 아픔을 묻고 살아야 하는 부모에 대한 최선의 배려인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 당사자의 용서가 없었는데도 재판부가 소년부 송치 결정을 한 점 역시 혜린이 부모로선 납득할 수 없었다. 가해자 측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혜린이 부모에게 진정 어린 사과는커녕 연락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선고를 앞두고 A양 대리인 측이 돌연 혜린이 대리인을 찾아와 합의를 제안했다. 처벌을 면하기 위해 제시된 합의 제안을 혜린이 부모는 단칼에 거절했다. 혜린이 측 변호를 맡고 있는 박새롬 변호사는 “혜린이가 극단적 선택을 한 날에도 낄낄대는 가해자들의 메시지만 봐도 반성의 기미라곤 찾아볼 수 없다. 가해자들에게 개전의 기회를 주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가해자 어떤 처분 받았는지 알 수도 없어
혜린이 부모가 가장 당혹스러워 하는 지점은 가해자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전혀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년법상 보호소년에 관한 심리(재판)와 처분(선고)은 비공개로 열리고, 전과 기록도 남지 않는다. 보호처분이 가해 소년의 장래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근거조항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년 재판에서 사건 진술권을 제외하고는 피해자를 위한 조항은 전무하다. 특히 혜린이 사건의 경우, A양과 B군의 가해행위 전모를 말할 수 있는 혜린이가 세상에 없다 보니, 피해자 측이 딛고 설 수 있는 공간은 한 뼘도 없는 상황이다.
검찰이 소년부 송치 결정에 반발해 재판부에 항고했지만, 혜린이 부모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형사소송법 409조에 따르면 항고는 재판 집행을 정지하는 효력이 없어, 재판부가 검찰 항고를 심리하는 사이 소년재판부에서 A양와 B군의 보호처분을 내리면 해당 판결이 곧 최종 판결이 되기 때문이다.
혜린이 부모는 “부모가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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