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주거 개선 앞장선 국제건축가들
달 기지 건설방안 재난 현장에 적용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활용, 기둥 제작
특수섬유 등 첨단 기술로 에너지 공급
삶의 터전 잃은 이들에게 기회 제공해야
편집자주
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여행이 있습니다. 세계 건축을 통해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살펴봅니다.
“재난은 집을 기반으로 살아온 모든 순간을 파괴한다.”
요르단 건축가 아비르 자이칼리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난민이 급증하고 있다. 유엔이 추산하는 전 세계 난민 수는 약 8,000만 명이다. 지구촌 전체 인구(80억 명)의 1%다. 예고 없는 재난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집은 사치에 가깝다. 운이 좋으면 임시 수용소에 머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임시 수용소라 해도 흙 바닥에 얇은 천 몇 장을 대충 두른 천막 정도다. 위생 및 주거시설이라 분류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 그저 몸 하나 뉘일 곳이 있을 뿐이다. 국제 건축계는 이 같은 난민 주거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이들은 쉽고 빠르고, 경제적으로 짓는 방법을 강구했다. 사생활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보이지 않는 삶도 배려했다. ‘1%를 위한 집’의 표본을 소개한다.
모래 튜브로 돌돌 말아 올린 돔
1984년 미 항공우주국(NASA)은 달 탐사 기지를 짓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우주선에 기지 건설을 위한 시멘트, 모래, 철근 등 무거운 건축자재와 장비를 싣기에는 무리였다.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란 태생의 세계적인 건축가 고(故) 네이더 할릴리(Nader khaliliㆍ1936~2008)가 달에 있는 흙을 자루에 담아 기지를 만드는 획기적인 방식을 제안했다. 전쟁터에서 참호를 만들 듯 자루만 가져가 흙을 담은 뒤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이었다. 달에서 실현되진 않았지만 할릴리는 재난 현장에 적용했다. 당시 그의 고국이었던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난민이 대거 발생했고, 그는 이들을 위해 주머니에 모래를 채운 ‘모래 튜브’로 돌돌 쌓아 올린 돔 형태의 집을 지었다. 각각의 튜브는 철조망으로 엮어 무너지지 않도록 고정하고, 흙을 덧발라 완성했다. 주변에 모래와 흙은 널려 있고, 집은 2, 3일이면 만들기 충분했다. 형태나 크기도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공기 역학적 구조로 설계된 돔은 지진이나 태풍, 홍수 등 2차 재난도 막아냈다. 이 집은 ‘어스백(Earthbag) 하우스’로 불린다. 할릴리는 1991년 미국에 비영리재단 ‘칼어스’를 창립하고 칠레, 아이티, 오만, 이스라엘, 알제리 등 전 세계 49개국에 집을 보급해왔다.
종이로 만든 집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당시 난민촌에 ‘종이 집’이 등장했다. 마치 나무기둥처럼 둥근 기둥이 이어진 벽에, 박공 지붕을 얹은 집들이 빠르게 들어섰다. 둥근 기둥은 종이 수백 겹을 얇게 붙여 튜브처럼 둥글게 만 지관(紙官)이다. 지관은 나무에 비해 가볍고 저렴하고, 구하기도 쉽다. 지관에 방수 처리를 하면 비가 와도 무너지거나 허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 이 종이로 만든 집은 일본 건축 거장 반 시게루(64)의 작품이다. 르완다를 시작으로 이듬해 일본 고베 강진, 터키 서북부 대지진(1999년), 인도 구자라트 대지진(2001년), 스리랑카 쓰나미(2004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2008년), 아이티 대지진(2010년), 동일본 대지진(2011년) 등의 현장에 활용됐다.
반 시게루는 “유엔의 난민캠프는 비닐로 된 깔개만 제공해주고, 난민들이 산에서 나무를 잘라 집을 짓는 게 다반사였다”며 “구하기 쉽고, 빠르게 집을 짓는 방법을 생각하다 종이를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약하디 약한 종이로 만들지만 그가 세운 종이 건축물들의 평균 수명은 50년이다. 무너져도 안전하다. 그는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결국 재해로 쓰러지면 더 큰 피해를 내지만, 종이 집은 그런 면에서 더 안전하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는 재난 건축 주택 설계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건축계 노벨상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24시간 만에 짓는 콘크리트 집
난민 주거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들은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건축가그룹 ‘컷워크(Cutwork)’는 24시간 만에 지을 수 있는 콘크리트 주택(Coretex shelter)을 제안했다. 이들은 금속 튜브, 콘크리트 재료, 창문 등 집을 조립할 수 있는 키트를 만들었다. 우선 금속 튜브를 끼워 구조를 만들고, 그 구조에 특수 콘크리트 판을 끼워 넣는다. 컷워크가 개발한 판은 말랑말랑하게 구부러지는 얇은 콘크리트로 돼 있다. 이를 고정시킨 후에 물을 뿌리면 콘크리트가 하루 만에 굳으면서 집이 완성된다. 원하는 곳에 문과 창을 내면 된다. 재난 현장에서 에너지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태양열 패널을 지붕에 붙이면 내부에서 전기를 쓸 수 있다. 내부도 주방이나 화장실 등 공간을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다. 컷워크는 “손쉽게 누구나, 공간과 약간의 물만 있으면 지을 수 있다”라며 “재난현장뿐 아니라 주택이 부족한 도시에서도 활용 가능한 방법이다”라고 소개했다.
재난 현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텐트를 변주한 건축가들도 있다. 포르투갈 디자인업체 ‘스튜디오무다’는 사각뿔 모양의 텐트 ‘로프티’를 낙하산처럼 하늘에서 낙하시키는 방법을 제안했다. 대나무로 만든 4개의 지지대에 천을 두른 완성된 형태의 로프티는 지상에서 조립할 필요가 없으며, 부지가 평평하거나 넓지 않아도 신속하게 세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르단 건축가 아비르 자이칼리(Abeer Seikalyㆍ42)는 아랍 전통 공예 기술에서 착안해 반구형의 특수 섬유 텐트(Weaving a Home)를 선보였다. 얇은 플라스틱 튜브를 바구니를 짜듯이 서로 엮어 지지대를 만든다. 이 지지대 사이로 방수와 방염 기능이 된 특수 소재 섬유를 붙인다. 특수 섬유는 낮 동안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밤에는 내부에 전기를 공급한다. 움푹 파인 돔 천장은 빗물을 받아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 물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이칼리는 “재난은 집을 기반으로 살아온 모든 순간을 파괴한다”라며 “거주자들이 이 작은 집에서 그들의 삶을 다시 엮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아 설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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