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 심산 김창숙
사전이 설명하는 우리말 '선비'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다. 학식과 자질은 있지만 벼슬을 마다하는 사람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론에만 밝고 현실에 어두운 사람이다. 후자처럼 쓰일 때도 '백면서생'처럼 결핍의 흠을 따지기보다, 딱함이나 안타까움의 뉘앙스가 더 강해 전자와 정확히 맞선다고 하기는 어렵다. 대개 선비의 어둑함은, 현실에 대한 무지의 어둑함이 아니라 현실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권력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고집의 어둑함이다.
글 읽는 이들이 전유한 봉건계급적 용어였던 선비는 유럽 사회의 '신사'라는 말처럼, 해방·건국 이후에도 개인의 인품을 가리키는 낱말로 탈계급화했다. '선비 같은'이란 표현에서 '~같은'은, 선비에 드리운 계급의 앙금과 전근대의 먼지를 걷어내는 거름종이 같은 형용사일 것이다.
하지만 선비는 20세기 이후 가장 남루해진 낱말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우선 언급되는 예가 드물다. 또 선비의 미덕은 절개나 염결성과 절제 등의 낱말로 분화해 쓰이고, 사실 그 각각도 자본주의 무한경쟁의 현실에서는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잦다.
심산 김창숙((1879.7.10~1962.5.10)은 너무 흔전만전 쓰여 나달나달해져버린 '조선 마지막 선비'라는 말의 주인으로 걸맞은 인물이다. 경북 유림으로 한학을 익힌 그는 상소로서 친일파의 단죄를 주장했고, 일제시대 독립자금 모금과 국제사회를 향한 독립 청원,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옥고를 치렀고, 교육·언론사업으로 계몽에 힘썼고, 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뒤에도 이승만을 향해 하야 경고문을 발표하는 등 노년까지 꼿꼿한 기상을 지켰다. 그를 이완용-일제-이승만과 맞서게 한 힘은 불의에 대한 항거, 즉 독립과 민족주의 너머의 선비정신이었다. 20대 말의 그는 계급타파를 주장했고, 40대의 그는 청년들의 영어 중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현실에 밝은, 다만 현실정치에는 넌더리 낸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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