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 피해 고령자들, 지난한 소송과정?
변호사 선임 비용 지원도 대다수 못 받아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소송 없이 정부가 지원
편집자주
어느 곳에 사느냐는 권력의 척도가 됐다. 소각로·공장·매립장이 들어서며 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었다는 사람들. 암으로 수십 명이 사망한 곳도 있다. 그런데, 목숨에도 등급이 매겨진 걸까. 정부는, 사회는 조용하다. 서울 한복판이라면 어땠을까. 지난 10년 주민들이 '인근 시설로 환경이 오염돼 질병에 걸렸다'며 환경부에 건강영향조사를 청원한 곳은 8곳에 이른다. 대책 없이 방치된 이들의 삶을 8회에 걸쳐 보도한다.
정순례(가명ㆍ83)씨를 비롯해 대구 안심동 진폐증 피해자 13명이 연탄업체 4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건 2016년 1월. 정부에서 인정된 피해자만 168명인데, 고작 13명이 소송을 냈다는 점에서 소송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소송이 길어지면서 원고 중 3명이 세상을 떴고, 중도 포기자도 나와서 단 6명(유족 3명)만이 남았다. 약 5년 만에 지난 1월 판결이 나왔다. 대구지법은 연탄업체들에 주민들에게 각 666만~3,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현재 업체들의 항소로 배상금은 받지 못한 상황이라 대다수 70·80대인 고령 피해자들이 생전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소송이라도 낼 수 있어서 다행일까. 인천 사월마을, 청주 북이면 등의 주민들은 심각한 피해에도 정부가 질병과의 상관관계를 인정하지 않아 소송도 낼 수 없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경우, 정부의 건강피해 기준에 부합하면 소송 없이 구제급여를 받을 수 있고,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도 정부가 자체출연금과 기업분담금으로 '특별구제계정'을 조성해 지원하도록 개입했던 것과 비교된다.
정부가 피해 인정해도, 또 개별 입증해야
고령의 원고들은 자신의 병을 입증하기 위해 검사부터 다시 받아야 했다. 소송이 길어졌던 가장 큰 이유다. 건강영향조사로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되긴 했지만, 개개인의 질병에 대한 인과관계는 피해자들이 다시 밝혀야 했다. 원고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경북 문경제일병원,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 등을 방문해 신체감정을 받았다. 자료를 보내 판정을 받은 곳만도 동국대ㆍ영남대병원, 대한의사협회 등 3곳이다.
진폐증은 그 원인을 석탄ㆍ연탄 등 광물성 분진으로 특정할 수 있는 질환임에도 입증과정은 지난했다. 소송을 담당했던 배기하 한솔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안심연료단지 피해자 중에는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자도 있었지만 이 경우 흡연 등 다른 요인도 작용할 수 있어 인과관계가 상대적으로 명확한 진폐증 환자들만 먼저 소송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연탄업체들은 원고 권모씨의 섬유공장 근무 이력을 걸고 넘어지는 등 책임을 부정했다.
암은 인과관계 인정 더욱 어려워
진폐증도 이런데, 암과 같은 비특이성 질환의 입증은 더욱 아득하다. 건강영향조사로 집단 암 발병이 확인된 익산 장점마을의 소송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지난해 주민 173명(암환자 16명 및 암 사망자 유족 16명 포함)은 암 발병의 원인이 된 비료공장 관리ㆍ감독에 소홀했던 책임을 물으며 전라북도와 익산시를 상대로 민사조정을 신청했다. 민사조정은 민사조정법에 따라 조정 절차를 거치고 조정이 성립되지 않으면 소송 절차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마을을 대리하는 홍정훈 전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암에 대해 진폐증처럼 특정 오염물질이 곧 발병원인임을 입증해보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환경성질환 판례는 원고측에 입증을 요구한다. 장점마을의 경우 비료공장에서 사용한 연초박이 암을 유발했다는 역학적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졌지만, 기존 판례대로라면 이는 불충분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변호사 선임비, 저소득층에만 지원 한계
대구시는 2015년 “환경분쟁조정신청과 소송 수행 시 필요한 사항은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그나마 환경오염피해구제법이 시행되면서 2018년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을 통해 뒤늦게 법률자문 비용 900만 원을 받은 것이 소송 지원의 전부다. 지원 신청 당시 남아 있던 원고 9명에 1인당 100만 원 정도의 지원을 한 것이다. 소송 지원제도는 저소득층이나 65세 이상 고령자, 장애인 같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다. 피해자 중 여기 해당하지 않는 경우는 기초적인 지원도 받기 어렵다.
법률자문 비용을 넘어, 변호사 선임비용 등 직접적 소송비용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저소득층(가구 월평균 소득 60% 이하)으로 한정한다. 소득이 조금 더 높거나, 가족의 부양을 받는 경우는 제외되기 일쑤다. 장점마을 주민들 중 민사 조정·소송에 참여한 인원이 173명인데, 이 중 51명만 자격을 갖춰 변호사 보수 및 소송비용을 지원을 받았다.
대구 안심동 주민들은 애초에 공익 소송을 맡아주겠다는 변호사가 없었다면 소송을 제기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배 변호사는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가 제대로 갖춰졌다면 이런 환경피해 소송은 훨씬 더 많이 제기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 동해시 송정동 주민들의 경우, 정부 조사가 있기 전에 스스로 피해를 구제하려고 나선 적이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주민 34명은 동해항동부메탈 공장 분진으로 주택이 훼손됐다며 2012년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환경분쟁재정신청을 했다. 주택가 벽면 오염으로 도색비, 청소비, 임대료 등의 재산피해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위는 현지 조사를 통해 3,503만 원을 배상할 것을 제시했지만 업체는 불복해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2015년 판결한 금액은 가산금을 제외한 2,750만 원. 1인당 평균 80만 원 정도, 일부는 10만 원 남짓의 푼돈이 지급됐다.
이후 2016년 환경부의 조사에서 오염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인정받지 못하면서, 질병과 관련한 소송은 내보지도 못했다.
◆국가가 버린 주민들
<1부>이들이 겪어온 고통
①질병이 덮쳐오다
②배상은 어디에
③이웃도, 생계도 잃다
④화 돋우는 지자체
※매주 월·목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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