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2017년이었다. 소펙사(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를 준비하면서 내추럴 와인을 처음 접했다. 당시 맛본 와인에서는 공통으로 쿰쿰한 향에 산미가 두드러졌고, 휘발성 산과 탄산감이 있는 와인도 있었다. 신기했다. 이때부터다. 내추럴 와인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프랑스, 일본,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내추럴 와인 바람이 불어왔다. 유행이 시작됐다. 필자는 ‘내추럴 와인’이라는 책과 1세대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내추럴 와인 메이커스’라는 책을 반복해 탐독했다. 아직은 생소한 이 장르에 책은 단샘처럼 갈증을 풀어줬다.
"자연 그대로 담아 생동감 넘치는 와인"
시간은 다시 한 달 전으로 흘러, 책을 감수하거나 직접 쓴 최영선 대표와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는 파리에서 ‘비노필’ 와인 에이전시를 운영하면서 유럽의 내추럴 와인을 한국에 소개한다. 내추럴 와인 행사인 ‘살롱 오(Salon O)’도 주관한다. 그는 내추럴 와인을 마신 다음날 숙취 없는 ‘신세계’를 경험하고부터 ‘땅에 대한 존중’과 ‘진실한 열정’으로 와인을 만드는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 자리엔 내추럴 와인을 한국에 처음 수입한 진정훈 대표(다경상사)도 함께했다. 그는 두 손 가득 우리가 마실 내추럴 와인을 들고 왔다. 내추럴 와인은 자연을 그대로 담아 만들어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고 했다. 같은 밭의 같은 생산자가 만든 와인도 빈티지와 병에 따라 맛이 다르고 마실 때마다 변화하는 와인의 세계가 재밌어 급기야 수입까지 하게 되었다고. 무엇보다 환경과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생산자들의 용기와 철학에 매료되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해가 중천인 이른 시간에, 내추럴 와인 마니아이자 주류와 주류업계를 애정하는 기자(심현희)의 집에서 와인을 펼쳐놓고, 내추럴 와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자리를 빌려 우리의 만남을 주선하고, 특별히 내추럴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를 손수 만들어 대접해준 심 기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유기농 와인과 뭐가 다르지?
그런데 ‘내추럴(Natural) 와인’이란 무엇일까. 비슷해 보이는 유기농(Oganic) 와인, 바이오다이내믹(Biodynamic) 와인과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유기농 와인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제한하거나) 사용하지 않고 포도를 재배해 그 규정에 맞게 양조한 와인이다. 대표적인 인증마크로는 유럽연합의 EU, 프랑스의 AB, 이탈리아의 ICEA, 미국의 USDA와 Made with organic grape 등이 있다.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은 가히 급진적이다. 천체, 특히 달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만든 달력에 맞춰 포도를 길러 빚은 와인이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슈타이너 박사가 창시했다.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천연비료를 만드는 방법 등 일련의 과정이 일견 ‘미신적’으로 보이지만, 와인 맛이 꽤나 훌륭하다. 인증기관에는 데메터/데메테르(Demeter)와 ‘비오디뱅(Biodyvin)’이 있다.
여과도 거치지 않는 와인
내추럴 와인은 현대식 농기계, 화학비료,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손수 농사지어 얻은 포도로 만든 와인을 말한다. 양조 과정에서도 최소한의 이산화황 외에는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는다. 와인을 맑게 하는 (정제나) 여과도 거치지 않는다. 특정 성분을 추출하지도 않는다. 오직 포도에 붙어 있거나 와이너리 내에 서식하는 자연 효모만으로 발효시켜 만든다.
‘효모’ 하니, 몇 해 전 읽은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책이 떠오른다. 저자인 와타나베 이타루는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히 좋은 자연 효모와 만나기 위해 시골로 이사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 그 가운데 빵을 맛있게 발효시켜줄 좋은 효모가 반죽에 내려앉기를 고대하며 묵묵히 빵을 구웠다.
자연 효모(천연효모)는 배양 효모(순수효모)와는 다르다(이름에 속지 말자!). 자연 효모는 좋은 향을 풍기기도 하지만, 나쁜 균과 결합하면 향은커녕 음식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좋은 자연 효모를 만나는 일은 그야말로 갖은 노력을 동반한 행운의 선물인 셈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와타나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 뒤, 효모를 기다려 그만의 향긋하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냈다.
효모로 발효하는 와인도 마찬가지다. 일반 와인에는 생산자에 따라 자연 효모를 쓰기도 하고 배양 효모를 쓰기도 한다. 배양 효모는 나쁜 풍미를 유발하거나 발효가 중단되는 위험을 예방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 와이너리 ‘고유의 맛’을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양조과학이 발달하면서 품종 고유의 향과 맛을 내는 ‘품종별 맞춤형 효모’까지 등장했으니 말이다.
자연 효모로만 발효... 숙취 덜해
내추럴 와인은 자연 효모만으로 발효한다. 시골 빵집 주인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자연 효모는 컨트롤이 쉽지 않다. 자칫 개성(?)만 있고 맛과 향은 좋지 않은 와인이 될 수도 있다. 건강한 효모가 많아야 제대로 된 와인을 빚을 수 있다. 그만큼 수고롭고 세심해야 한다.
자연 효모를 사용하는 것이 내추럴 와인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내추럴 와인과 일반 와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따로 있다. 사실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바로 ‘이산화황’이다.
와인의 역사에서 이산화황은 ‘윈드 오브 체인지’를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와인 탄생 이래로 줄곧 골칫거리였던 산화와 보존이라는 두 문제가 해결됐다. 산화와 보존은 균과의 전쟁이자 공존이라는 딜레마를 풀어야 하는 문제다.
포도 자체에는 물론이고, 와이너리 내에는 효모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균이 공존한다. 소독을 위해, 살균을 위해, 안전한 발효를 위해, 산화 방지를 위해 이산화황을 사용한다. 게다가 레드와인을 발효하는 과정에서 색과 폴리페놀을 추출할 때도 이산화황이 요긴하다.
내추럴 와인에는 ‘팔방미인’ 이산화황을 극소량만 쓰거나 아예 쓰지 않는다. 와인의 색과 스타일에 따라 다르지만 레드 와인을 기준으로 보자면, 대체로 일반 와인에는 리터당 150mg, 유기농 와인에는 100mg, 바이오다이내믹 와인에는 70mg, 내추럴 와인에는 30mg 이하로 이산화황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일부 내추럴 와인 관련 종사자나 애호가들은 내추럴 와인이 일반 와인보다 두통이나 숙취가 덜하다고 한다.
이산화항 안 쓰는 데 왜 함유라고 쓸까
재미있는 점은 포도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황이 자연적으로 소량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산화황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내추럴 와인이라도 레이블 뒷면에 ‘이산화황 함유’라는 문구를 적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산화황은 채소, 과일, 버섯 따위를 건조하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양이 같은 일반 와인에 견주어보면 이들의 이산화황 함유량이 비슷하거나 훨씬 많다.
내추럴 와인이 일반 와인과 다른 점이 또 있다. 내추럴 와인에는 포도 이외에 어떤 것도 첨가하거나 빼면 안 된다. 알고 보면 일반 와인 양조에는 생각보다 많은 (안전성을 인증받은) 첨가물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경우에 따라 규정 내에서 포도 당도가 낮을 땐 설탕을, 산도가 부족하면 주석산을, 필요하면 타닌도 첨가한다. 지역에 따라 50~70가지 군의 첨가제와 처리제를 허용한다. 또한 무균 여과를 하기도 하고 와인에서 역삼투장치를 이용해 과한 성분을 분리해 빼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수분과 알코올이다. 내추럴 와인은 그 이름처럼 그야말로 최대한 자연 그대로 양조하려는 노력이 빚어낸 산물이다.
내추럴 와인 전문가이자 애호가인 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제는 역사, 철학, 기술, 시장을 넘나들며 와인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러다 문득 ‘내추럴 와인 메이커스’ 책에서 본 믿고 싶지 않은 대목이 떠올랐다. ‘이산화황 무첨가’에 방점을 찍고는, 포도즙을 살균하거나 이산화황이 필요 없는 효모를 사용해 만든 와인을 ‘내추럴 와인’으로 파는 이들이 있다. 진지하게 와인을 만들어온 1세대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이 개탄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일부 꼼수를 쓰는 이런 생산자들을 걸러낼 장치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은 13명만 가입된 S.A.I.N.S.나 프랑스의 내추럴와인협회(Association des Vins Nature:AVN)나 빈나투르(VinNatur) 등과 같은 자발적 단체는 여럿 있을지언정 검증하고 인증할 공식적인 기관이 없다 보니 ‘내추럴 와인’을 쓴 이자벨 르주롱의 말마따나 “내추럴 와인이라는 용어가 남용되고 비난의 대상마저 되고 있다”.
다행히 2020년 루아르에서 내추럴와인조합(Syndicat de Defense des Vins)이 설립되었다. 아직 시작 단계라 가입한 생산자가 소수이지만, 인증받은 와인에는 ‘뱅 메토드 나튀르(Vin Methode Nature)’라는 문구가 표기된다.
모쪼록 제도가 정비되어 훌륭한 철학과 정직한 땀방울을 더해 바른 방식으로 만든 내추럴 와인이 제대로 평가받았으면 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내추럴 와인이 더 이상 생소한 장르가 아니다. 다양한 내추럴 와인이 수입되고 있다. 골목마다 내추럴 와인 전문 바와 가게가 곳곳에 생기고 있다. 필자의 단골 와인 가게는 내추럴 와인 매대가 한 국가의 와인 매대보다 넓다. 일반 와인만 팔던 술집과 가게에도 내추럴 와인이 자주 보인다.
쿰쿰한 헛간 냄새도 나지만...
그런데 아직 필자가 적응하지 못한 내추럴 와인의 특징이 있다. ‘브레타노미세스’라는 균으로 인해 생기는 쿰쿰한 헛간 냄새가 느껴질 때이다. (공기와 접촉하면 날아가는 환원향과는 다르다) 이자벨 르주롱은 ‘복합미와 결함의 경계는 모호’하다며 본인은 이런 특징을 가진 와인에서 개성과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필자는 내추럴 와인 경험이 적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냄새에 선뜻 다가서기 어렵다.
해가 중천일 때 시작한 그날의 자리에는 내추럴 와인 빈 병이 하나둘 늘었다. 소비뇽블랑, 샤르도네, 리슬링, 샤슬라, 피노그리, 가메, 그르나슈, 피노누아, 시라(쉬라즈) 품종 등으로 만든 스틸 와인. 기포가 있는 펫낫(Petillant Naturel의 준말), 기포가 좀 더 많은 무쉐(Mousseux), 화이트 와인, 로제 와인, 오렌지 와인, 레드 와인, 클래식한 맛의 와인에서 개성이 강한 펑키한 맛의 와인까지.
그렇게 우리의 내추럴 와인 이야기는 석양 녘까지 계속되었다. 어느새 와인병이 모두 비워졌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눈 덕분인지, 이산화황이 없는 내추럴 와인을 마신 덕분인지는 몰라도, 과음한 다음날인데도 필자는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문득 최영선 대표가 쓴 책 서문이 떠올랐다. “주량을 훌쩍 넘겨 마시고도 이렇게 멀쩡한 적이 있었던가. 지난밤이 다른 날과 달랐던 유일한 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내추럴 와인만을 마셨다는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