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8>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
‘심청이 죽막동에서 바다에 빠졌다고?’
심청전, 우리 전통 설화, 거친 바다 항해를 앞두고 제의의 하나로서 젊은 처녀의 희생 그리고 그 이면에 숨은 부와 명예 이야기이다. 누구나 바닷가에서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보면 그 너머 있을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바닷길은 위험한 길이지만 멀리 빠르게 갈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일찍부터 조각배로 대양으로 나가게 만든 것이다. 선사나 고대사회에서 바닷길은 어떤 지역의 문화를 발전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던 것은 틀림없다.
남태평양에서 발견되는 야광패(夜光貝)나 앵무조개가 우리나라 신라 고분에서 나오고 인도양에서 발견되는 개오지 조개가 중국 운남성의 고대묘에서 나오는 것은 바로 첨단 그리고 가장 귀한 문화의 흐름이 바다를 통해서 많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고대 유적에서 외래계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고대 항해문화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전북 부안군 죽막동 제사유적은 아마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 사람들의 꿈의 항해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 옛날 극적 반전의 ‘바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다.
적벽강(赤壁江) 위의 죽막동(竹幕洞)
죽막동 유적(사적541호)은 부안 변산반도의 끝에 해당되는 지점인데 적벽강 위에 있다. 유명한 관광지인 격포해수욕장의 북편이고 남쪽으로는 채석강이 있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지 오래지 않은 탓인지 아직은 관광지도에는 수성당(水城堂)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고군산군도, 상왕등도, 위도, 석도 등의 섬들이 수평선 아득히 전면에 펼쳐지는 곳이다. 그 군도들은 옛날에는 뱃길로 다녀야 했지만, 오늘날 일부는 새만금방조제에서 연결되어 군산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다.
선유도를 들러서 고려시대에 송나라 휘종의 국신사인 서긍(徐兢)이 머물면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仕高麗圖經)에 기록을 남긴 망주봉 아래의 오룡묘(五龍廟)를 찾았다. 서긍 일행은 사단(斜斷) 항로를 따라서 흑산도, 위도를 거쳐서 선유도에 도착한 다음 이곳 군산정(群山亭)에서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의 영접을 받아 개성으로 향하였다. 송산행궁터나 자복사는 어디인지 알아보기 힘들지만, 이 일대가 긴 항해로 고단한 이들의 쉼터였음은 산으로 둘러싸인 반달형 개펄지형이 말해준다.
적벽강이라는 지명은 중국의 소동파가 놀던 곳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그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표현한 것이다. 적벽강이나 채석강, 두 지점 모두 약 9,000만 년 전 공룡의 시대인 중생대 후반에 속하는 지질로 국가지질공원의 명승지로 잘 알려져 있다. 채석강은 퇴적암의 수평 층리를 보이고 있지만, 적벽강은 용암의 주상절리를 보이는데 파도에 침식되어 수성당 바로 옆에는 설화 속 여울굴인 해식애 수직동굴이 형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지질형성 과정이나 해양환경은 격포해수욕장의 북편 끝에 있는 국립공원안내소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죽막동의 유물에서 읽히는 고대인의 염원
죽막동 유적은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사용된 그릇이나 폐기된 음식 유물들이 남겨진 곳이다. 그래서 지금은 땅 위에서 볼 수 있는 구조나 유물은 없다. 변산면장이 감칠맛 나는 글로 반기는 간판, 그리고 국가사적표지가 보일 뿐이다. 1990년대 초에 진행된 국립전주박물관의 발굴보고서에는 수성당의 뒤편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대나무로 둘러싸인 높은 소나무들이 서 있는 마당이 발굴지점이 되겠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대체로 제의가 시작된 시기가 4세기 후반경으로 볼 수 있다. 또한 5~6세기에 제의가 훨씬 복잡해지고 당시의 국제적인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사의 주인공은 마한, 백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토기와 금속 유물 중에는 가야계의 집단이 중국과 통교한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제의는 현대까지 지속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유물 종류로는 제기로 사용된 토기나 도자기류가 많은데 제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들이 보여 이채롭다. 그중 삼국시대 큼직한 항아리나 높은 토기대(臺)가 보이는데 이것은 마구(馬具)처럼 대단히 고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과 함께 나타난다는 점에서 제사의 규모나 높은 격을 보여준다. 여러 모양을 한 철기유물들은 항아리 속에 넣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제상(祭床)의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을 상상케 하는 유물이다. 돌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축소 모형물들은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무인도인 오키노시마(沖ノ島)의 해양제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일본 스에키토기의 영향과 더불어 5~6세기 백제와 왜의 교류의 분명한 징표인 셈이다. 큼직한 흑유(黑釉) 항아리는 분명히 다른 중국 도자기들과 함께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왔을 것으로 보이는데 서울 송파의 풍납동 백제 왕성 유적에서도 여러 점 발견된다는 점에서 이 지점의 해양제사가 국가적 제사였다고 볼 수 있고 백제와 중국 남조의 국제적 교류도 엿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속하는 청동방제경이나 머리가 부러진 토제말들은 제사유적에서 흔히 보이는 요소다. 청동거울은 태양의 힘을, 말은 빠르고 안전한 여정을 의미할 것이다. 중국의 예를 보면 말이 수신과 결합하여 용이 된다는 믿음이 있어 이러한 해양신앙에 말이 등장하는 연유를 암시한다. 우리나라의 산성이나 미륵사와 같은 절터에서도 토제나 철제말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분명 먼 거리 출정을 앞두고 이뤄지는 제의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해신, 할미와 딸들 그리고 백의관음
죽막동 유적의 고대 제사에서는 어떤 신을 모시고 바닷길의 안녕을 빌었을까? 오늘날 현재의 자리에 위치한 수성당 건물은 19세기 후반의 것이지만, ‘개양할미와 여덟 딸’의 신앙은 아마도 오래전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일대 섬과 변산반도 지역에는 여러 지점에 해신당들이 있는데 여신(女神)을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변산반도 지역은 서해안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이 해신당 당신도(堂神圖)의 주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위도의 내원암과 래소사의 불당에 백의관음이 보이는 것은 분명 중국 보타산(普陀山) 관음성지의 신앙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타산이 바로 서긍이 출발한 지점이다. 백의관음은 33관음상 가운데 아이 출산과 생명을 보살피는 보살로 해신으로 숭배되는 신앙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록에도 신라인들이 관음을 싣고 중국에서 배 타고 오다가 풍랑이 거칠어서 내려놓았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뱃사람들의 관음신앙은 대단히 오래된 것이고 지역에 따라 민간신앙과 융합되어 개양할미나 위도 원당의 원당마누라 등 다양한 여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보기도 한다. 이곳 수성당에 나타나는 개양할미신앙에서는 바로 옆에 해식동굴이 있다는 점에서 낙산사의 관음신앙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관음신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설화가 바로 ‘변산판’ 심청설화이다. 이 지역에 살았던 백제의 안씨 성의 여인이 뱃사람에게 팔려가 보타산에 도착한 다음 심씨 집안의 양녀가 되고 나중에 진(晋)나라 왕후가 된다. 심씨 왕후가 고향의 아버지를 위해 관음상을 배에 실어 보냈는데 관음상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던 곡성의 관음사에 봉안하게 되었다는 절의 연기설화는 이 지역과 중국 절강성 명주와의 교역로를 암시한다. 개양(開洋)이라는 중국 주산 지역의 해양제사에서 나오는 명칭이라든지 위도에서 발견된 중국 인물조각상의 당송대 복식이 변산반도 일대 당신도의 복식에 표현돼 있는 점도 황해 사단항로가 바로 거대한 해양실크로드의 황해판이고 심청설화가 그 해양문화의 상징적 압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선(滿船)의 꿈을 위한 기도
현대에 들어서도 위도에서 격포항으로 오던 여객선이 침몰하여 292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보면 섬 사이의 급한 반류(反流)로 인해 항해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러한 위험 속에서도 이 지역의 조기 어업은 아마도 고대부터 사람들을 이곳에 몰려들게 하였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세워진 위도 원당(願堂)의 중수기(重修記)에 황해도나 제주도에서 돈을 낸 사람들이 기록된 걸 보면 먼 지역에서도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조기잡이에서 만선을 하면 엄청난 부(富)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안 보물선에서 보듯 꿈을 실은 국제교역이나 만선 같은 바다의 매력은 어떤 위험도 감수할 만큼 강한 것이다. 바다가 자는 듯 쉬어서 사고만 없다면...
수평선과 그 위에 멀리 떠 있는 섬들을 보고 있으면 홍길동전의 율도국 같은 희망의 판타지가 생겨난다. 심청을 물에 밀어넣지 않더라도 바다에 나가기 전에 정월에 띠배라도 바다에 띄워 액막이를 해야 불안한 마음이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오늘날 화석화한 위도 띠배놀이는 마한시대 이래 거의 2,000년 가까이 인간의 욕망이 깃든 간절한 기도의 표현이다. 적벽강 옆 맑은 바닷물이 오가는 자갈해변을 떠나며 절벽 틈 사이에 놓인 작은 돌탑들을 보니 나도 하나 만들어두고 가고 싶어진다. 서울로 돌아가는 금요일 오후 길이 안전하고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