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곤충은 겹눈입니다. 수많은 낱눈으로 들어온 영상을 모아 사물을 모자이크로 식별합니다. 사람의 눈보다 넓은 시각, 더 많은 색깔 구분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선레이스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거칠고 복잡한 대선판을 겹눈으로 읽어드립니다.
민주당이 월요일(30일)부터 충청권을 시작으로 대선 후보 지역 순회 경선에 돌입했다. 추석 연휴 직후인 내달 25일 광주·전남 투표가 피크가 될 것이고, 10월 9일 경기와 10일 서울로 마무리된다.
나름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지고 있지만 지난 두 달여 동안 1, 2위 인물과 순서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래서 당장의 관심사는 10일 최종 후보가 선출되느냐, 1위와 2위가 결선 레이스를 한 번 더 펼치느냐다. 나아가 그 결선을 통해 역전 드라마가 쓰일 수 있느냐다.
현재 주요 정당의 대선 경선 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 순회 경선을 진행하고 대의원을 포함한 권리 당원과 일반 유권자의 의사를 종합해 후보를 뽑는다.
1971년 신민당 후보 경선을 제외한다면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실질적 ‘당내 경쟁’이 시작된 것은 현 야권 쪽에선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이회창 후보 선출), 현 여권 쪽에선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노무현 후보 선출)부터다. 이 두 경선을 통해 큰 틀이 정해지고 시대 상황과 정치적 환경, 기술적 발전을 반영한 보완이 거듭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여야의 모든 경선이 시작은 다자구도였지만 대세론, 표쏠림, 자진사퇴, 컷오프 등의 요인으로 결선까지 간 적은 거의 없다.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이 유일하다.
민주당 계열의 경우 2007년 경선(정동영 후보 선출)이 매우 치열했지만 예비경선-본경선 시스템으로 결선 제도가 없었고 2012년, 2017년 경선에선 두 차례 다 문재인 후보가 50%를 훌쩍 넘긴 득표율을 기록해 어렵지 않게 후보가 됐다.
그렇다면 1997년 신한국당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른바 ‘9룡’의 경합으로 시작됐지만 경선 레이스를 완주한 것은 6인이었다. 실질적으론 '이회창+@' 구도였다. 민정계가 주로 이회창 후보 쪽이었고, 김영삼 대통령을 업은 민주계가 주류였지만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 후보의 난립 등으로 역량이 분산되어 있었다. 경선 결과에서도 이회창 후보의 선거인단 득표수는 4,955표로 2위 이인제 후보(1,774표)의 거의 3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은 40.9%에 그쳤다. 2위 이인제 득표율이 14.7%, 3위 이한동이 14.6%, 4위 김덕룡이 13.8%, 5위 이수성이 13.6%, 6위 최병렬이 1.9% 순으로 2~6위의 합이 50%를 거뜬히 넘긴 것.
흔히들 2위가 힘을 내서 1위에 근접하면 결선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선 성사의 핵심도 아니다. 1위의 득표 비중이 전체의 50% 아래여야 한다. 즉, 2~6위의 합이 50%를 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이나 이번 민주당 경선이나 같은 이치다.
1997년 신한국당 경선 결선 투표는 1차 투표 결과 발표 직후 현장에서 곧바로 실시됐다. 이회창, 이인제 두 결선 진출자에겐 각각 10분의 정견 발표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전날 이인제, 이한동, 김덕룡, 이수성 네 사람은 ‘반(反)이회창 연대’를 결성해 누가 결선투표에 진출하든 표를 모아주기로 합의해 안전장치를 만들어 뒀었다. 하지만 2~5위 네 사람의 표는 완전히 결집하지 못했다. 결선 투표 결과 이회창은 득표율을 59.96%로 끌어올리며 40.0%를 기록해 선전한 이인제를 너끈히 따돌렸다.
지금보다 ‘보스의 장악력’이 말도 못 할 정도로 강하던 시절에도 윗선의 ‘오더’는 절반만 먹혔다. 이처럼 결선이 막상 성사되더라도 뒤집기는 더 어렵다. 물론, 모두가 아는 대로 1997년 신한국당 경선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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