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김치 현지화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가의 한 대형 마트. 냉장식품 매장에 김치가 진열돼 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 곁에 낯선 김치 상표들이 눈에 띈다. 직원이 몇 가지를 집어 들고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생산한 김치"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의, 인도네시아(인)에 의한, 인도네시아(인)를 위한' 김치인 셈이다.
김치는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음식 1위에 꼽혔다. 한류 때문에 맛보고 건강에 좋다는 각종 추천 덕에 매료됐다. 한국산 배추 종자를 들여와 고랭지에서 기른다. 몇 년 전부터는 김치 현지화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산 수입 김치에 비해 맛은 떨어지지만 가격은 절반가량이라 호주머니가 얇은 서민에겐 안성맞춤이다.
이 땅의 김치 현황은 주로 한국산 김치 수입에 초점이 맞춰졌고 현지인 생산업체를 소개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인터뷰했다. 2억7,000만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는 김치 세계화와 현지화, 김치 저변 확대 차원에서 우리에게 뜻깊은 존재다.
"한국에서 직접 전수받은 솜씨"
인도네시아인이 직접 김치를 생산하는 현지 업체 두 곳과 접촉했다. 모두 지방에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동제한 조치를 감안해, 율리아나 링가(44) 김치맘(Kimchi Mom) 대표, 크리스틴(25) 김친구(Kimchingu) 대표를 각각 전화로 만났다.
-김치 사업은 언제, 왜 시작했나.
율리아나: "2017년 말이다. 배추를 재배하는 주변 농장과 상생하기 위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서부자바주(州) 반둥에 있다."
크리스틴: "2018년이다. 한류가 유행하고 있어서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동부자바주 수라바야에 김치 생산업체가 적다는 점도 고려했다."
-김치 담그는 법은 어디서 배웠나.
율리아나: "처음에는 유튜브를 통해 배웠다. 정통 김치를 만들기 위해 2019년 직원들과 함께 대구 김치공장에 가서 기술을 익혔다. 특별한 요령은 없고 한국의 제조 기준을 충실히 따른다. 현재 직원은 5명이다. 가장 인기 있는 배추김치만 담근다. 배추는 근처 농장에서 기른 걸 쓰고 양념은 한국에서 수입한다."
크리스틴: "독학했다. 동영상 등 인터넷 정보를 활용했다. 인도네시아인들 입맛에 맞는 김치를 만들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었다. 김치 맛은 제조 공정만큼 마음가짐도 중요해서 항상 즐겁게 담근다. 직원 4명과 함께 배추김치, 깍두기, 파김치를 만든다."
-주로 누가 사나.
율리아나: "10대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하다. 모두 인도네시아인이다. 한 번 구매하면 대부분 다시 살 만큼 반응이 좋다. 가격은 75g에 1만 루피아(약 800원), 300g에 2만7,000루피아(약 2,200원)다. 월 판매량은 1톤가량, 금액으로 따지면 1억 루피아(800여만 원)다. 매출은 증가세다. 자바섬과 발리섬 등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에서 판다."
크리스틴: "20, 30대 여성이 주 고객이다. 250g에 2만9,000루피아(약 2,300원)로 품질 좋은 재료만 사용해서 프리미엄 김치로 통한다. 매달 배추김치는 100㎏, 다른 김치는 50㎏씩 팔린다. 누적 판매량은 10톤이 넘는다. 온라인 판매만 한다."
-중국 김치 원조 논란을 아나.
율리아나: "한국이 중국에서 김치를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렇게 주장하겠지만 김치는 한국이 원조다. 중국 김치는 가짜다. 한국이 강하게 특허권이라도 주장해야 한다. 다만 인도네시아에선 '김치=한국'이라고 이미 알고 있으니 한국인들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크리스틴: "중국 김치는 모른다. 가까운 나라이니 비슷한 음식이 있을 수도 있지만 김치는 한국의 고유 음식이다. 인도네시아의 거의 모든 사람이 김치는 한국이 원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두 사람은 김치 사업의 전망을 밝게 봤다. "한 번 맛보고 김치 맛에 빠져든 인구가 늘고 있는 데다 김치가 건강에도 좋다는 정보가 널리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온라인 쇼핑몰 토코페디아에 김치 상점이 500개 이상이라는 사실은 이들 주장에 힘을 싣는다. 대부분 소규모 업체지만 한국 김치를 이 땅에 알리는 귀한 일꾼들이다.
김치에 홀린 3가지 이유
인도네시아엔 김치와 비슷한 전통 음식이 있다. 채소나 과일을 소금에 절이거나 식초에 담근 아시난(asinan)이다. '짜다' 또는 '소금 절임'을 뜻하는 단어 아신(asin)에서 유래했다. 고춧가루 대신 고추를 양념으로 쓰지만 발효는 하지 않는다.
재료에 따라 배추 양배추 등 채소를 소금과 식초에 절인 아시난 브타위와 열대과일을 절인 아시난 보고르(지역 이름)로 나뉘는 걸 감안하면 아시난 브타위가 김치에 더 가깝다. 신맛, 짠맛, 단맛, 약간 매운맛이 난다. 브타위는 자카르타의 토착 부족이다. 고추 오이 마늘 등을 식초에 절이는 '인도네시아 피클' 아차르(acar)도 있다. ①요리(아시난)나 밥 반찬(아차르)으로 흔히 먹는 이들 고유 음식 덕에 김치를 쉽게 받아들인다.
번역가 루루(25)씨는 "김치는 아시난처럼 신선한 맛이 난다"며 "김치 맛에 익숙해지니까 밥을 먹을 때 아시난보다 김치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신선한 신맛이 기름진 음식의 느끼한 맛을 덜어주는 김치는 밥을 먹기에 완벽한 음식"이라고 극찬했다.
'김치=건강 식품'이라는 인식도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특히 ②코로나19 사태 이후 현지 매체들은 미국 유럽 등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면역력 강화 등 발효음식 김치의 효능을 잇따라 소개했다. 대두를 바나나 잎에 싸서 발효시킨 다음 그대로 튀기거나 밀가루를 묻혀 튀기는 전통 음식 '템페(tempeㆍ실제 발음은 뗌뻬)', 신맛이 나는 고유 발효차 '콤부차(kombucha)'에 이어 다른 나라 음식인 김치를 3대 건강 발효식품으로 꼽을 정도다.
대학생 나다(23)씨는 "여러 나라의 연구기관이 김치를 건강 식품이라고 밝혀서 그런지 김치를 먹으면 건강해지고 음식 섭취의 균형이 잡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수라바야대 연구팀은 "신맛과 매운맛이 어우러진 김치는 건강 관리 및 유지용 일상 반찬으로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한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③한국 드라마를 섭렵한 한류 팬 사이에선 '직접' '싸게' '인도네시아인 입맛에 맞게' 김치 담그는 방법, 김치찌개·김치전 등 각종 김치 활용 요리법 알리기가 유행이다. 대학생 마르셀라 레이나씨는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영감을 받은 건강 김치 요리법을 공개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는 "코로나19 제한 조치 기간에 긍정적인 활동과 건강 식품 섭취로 면역력을 높이자"고 제의했다.
다만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인도네시아인이 직접 담근 김치보다 한국에서 수입하거나 이곳 한식당 등 한인이 만든 김치를 아직 더 선호했다. "인도네시아산 김치는 맛이 깊지 않고 싱거우며 너무 시큼하다"는 것이다. 수입 김치가 두 배 정도 비싼 걸 감안하면 인도네시아산 김치의 장점은 가격 경쟁력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인도네시아 김치 수출은 증가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인도네시아 김치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43.8% 늘었다.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문화원 등은 매년 현지인 대상 김장 행사를 열고 만든 김치를 빈민촌, 고아원에 나눠주고 있다. 김치를 직접 담그거나 다양한 경로로 김치를 접하는 현지인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김치맛 과자도 팔린다.
이창현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자카르타 무역관 부관장은 "김치 완성품 수출뿐 아니라 직접 담글 수 있게 양념을 모은 '한국산 김치 DIY(Do It Yourself) 꾸러미'를 공급하는 것도 김치 현지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지인이 말했다. "김치 맛에 빠지니 자꾸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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