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투입 지향적인(input-oriented)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사회 속의 다양한 이익은 자율적 결사체들에 의해 조직된다. 이들의 요구를 공공 정책으로 집약해 내는 것은 정당의 역할이다. 입법과 예산으로 전환하는 일은 의회가 주도한다. 이익 정치, 정당 정치, 의회 정치의 삼박자가 사회적 합의 형성의 기초가 되고, 그 위에서 행정부의 산출(output) 기능이 발휘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한다.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지 34년째인데도 행정 수반인 대통령이 정치과정 전반을 지배하는 악습은 계속되고 있다. 국회에서 사활적 '입법 전쟁'을 발생시키는 사안의 대부분은 이른바 '대통령 관심법안들'이다. 입법 전쟁은 2007년 말 대선과 2008년 총선을 압승한 대통령과 그의 정당이 18대 국회를 주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입법 100일 작전"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대통령 공약 사안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국회를 유사 전쟁터로 만들었다. 지금도 별다르지 않다.
정당이 대통령과의 사적 거리감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문제다. 그간 이들은 친노-친이-친박-친문으로 불렸는데, 이보다 한국 정당 정치의 '대통령 중심성'을 잘 보여주는 용어도 없다. 혹자는 이 모든 게 '3김 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다르다. 기본적으로 3김 정치는 정당이 중심이 된 정치였다. 그들은 정당에서 성장했다. 당내에서 경력을 쌓고 당내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정당의 정치인이었다. 3김 가운데 두 명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대통령이 된 다음 그들은 '당정분리' 원칙에 따라 자신의 당에 미치는 영향력을 차단당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의회주의자였고 정당 중심주의자였고, 그때는 국회도 정당도 자율성을 다 잃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국회와 정당 안에서 정치인이 성장하지도, 대통령이 되지도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여론을 양분시켜 한쪽에서는 적대의 대상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복수 의식을 자극하는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된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국회와 정당 밖에서 일을 도모한다. 당 밖에서 지지 여론을 만들어 당에 진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는 열정적 지지자 집단이 없으면 정당을 장악하기도, 대통령이 되기도, 대통령이 되어서도 국회와 여론을 지배할 수도 없다.
4,000만 유권자를 위한 대통령은 비합리적이다. 4,000만의 1%, 아니 그 절반이면 충분하다. 20만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언론사의 기사 작성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쉽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물론 국회 입법청원도 자유롭다. 의원들의 입을 막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당내 경선도 여론 동원과 권리 당원 매집에 나서주는 열혈 지지 세력이 있어야 유리하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소수의 열혈 인간들이 대통령을 만들고 세상을 호령하는 시대다.
물론 '대통령 해 먹기'가 편안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하려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지율에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는 게 일상이다. 여당 안에서 자신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최고로 두려워한다. 임기가 끝나갈수록 마음은 지옥이다. 여야를 가로질러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통령도 불행하다. 이런 대통령제를 계속해야 할까? 그 이유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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