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부터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했다는 정황이 공개되자 한미는 약속이나 한 듯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기조를 보이고 있다.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는 건데,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가 나오기 전부터 영변의 움직임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양국의 속내는 사뭇 다르다. 미국은 ‘영변 리스크’를 키우면 북한의 몸값만 올라가는 탓에 핵활동 재개를 구태여 까발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핵개발 재개 움직임을 인지했다고 시인할 경우 남북 통신선 복원(7월 27일)이 북한의 ‘위장 평화’ 전술로 치부돼 모처럼 살린 남북관계 개선의 불씨가 수그러들 것을 염려했다는 평가가 많다. “북한과 대화 재개”라는 종착점은 같지만, 대화로 향하는 방법론에서 한미의 생각이 확연히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31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은 “한미가 이미 영변 핵시설 재가동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한 안보당국 관계자는 “영변뿐 아니라 다른 핵시설까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면서 “실제 핵물질을 추출했는지까지 확인은 어려우나 북한 핵활동 정보는 한미가 늘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IAEA는 전날 보고서를 통해 영변 핵시설 냉각수 방출 정황을 근거로 “북한이 5㎿(메가와트)급 원자로를 7월 초 재가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美 '김정은에 말려들라'... 전략적 무시
미국은 IAEA 보고서에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30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영변 핵시설 재가동 가능성에 “우리는 동맹과 북한 문제에 대해 긴밀히 조율하고 있다”면서 “(IAEA) 보고서는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화와 외교의 긴급한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영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내비치며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촉구하는 원론적 입장을 재차 천명한 셈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북한이 영변 핵설비를 다시 돌렸다고 쳐도 큰 변수는 아니라고 본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진짜 핵물질을 생산하려는 의도였다면 일거수일투족이 한미 감시망에 포착되는 영변 대신 더 은밀한 장소를 택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거의 모든 정보가 알려진 영변 카드를 내보이는 것 정도는 미국의 계산에 다 들어 있다는 얘기다.
정세를 뒤흔들 만한 북한의 무력 도발만 아니라면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기류도 엿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비핵화 없이는 대북제재 해제도 없다”는 대원칙을 세워두고, 북한에 연일 대화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미의 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된 마당에 핵시설 재가동에 미국이 주목할 경우 그 순간부터 북한에 끌려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의 노림수에 말려들지 않으려 미국이 ‘전략적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는 풀이다.
'핵가동 인지 시점' 대답 못 하는 文정부
우리 정부도 영변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으나, 핵시설 재가동을 구체적으로 언제 인지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한미는 북한 핵ㆍ미사일 활동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면서 “이런 북핵 고도화는 대북 관여가 시급하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통신선 복원에 앞서 관련 정황을 포착했느냐는 물음에는 “정보 사안이라 확인하기 어렵다”고만 답했다.
앞서 정부는 7월 27일 남북 통신선 복원 합의를 발표하며 3개월 동안 양측 정상이 서신을 교환했다고 소개했다. 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통신선 복원의 막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영변의 이상 징후를 청와대와 국정원이 몰랐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남북대화 동력이 소멸될 것을 우려해 쉬쉬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만한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는 “남북 간 신뢰 회복이 보다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선 복원을 먼저 추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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