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인제군에 있는 유일한 홀스타인 종 소들이에요. 신기하다고 주변에서 구경도 온다니까요. 이 소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아요. 사료 대신 건초 중심으로 먹이면서 건강하게 돌봐야죠."
6마리 소에게 임시 보호처를 제공한 한우농가 하늘내린목장 목장주 권충교씨
지난달 18일 강원 인제군의 한우농가 하늘내린목장의 축사 한 켠. 홀스타인 수소 6마리가 다가서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호기심을 보였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동해물)이 열흘 전 도살 직전 구조해 이곳으로 데려온 소들이다. 이 공간에서 소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6개월. 이후에는 다른 보호처를 찾아야 한다.
홀스타인 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얼룩무늬가 특징인 젖소다. 홀스타인 종 암소는 우유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지만 수소는 고기생산을 목적으로 사육돼 육우라고 불린다. 하지만 동해물은 젖소, 육우라는 말 대신 홀스타인 여성, 남성 소라고 부른다. 먼저 젖소, 육우라는 단어 자체에 우유와 고기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다. 이들은 또 종 평등을 위해 암컷과 수컷 대신 여성과 남성, 동물을 셀 때도 마리 대신 '목숨 명(命)'을 쓰자고 제안한다. 이들이 6마리의 소를 구조하게 된 이유는 뭘까.
개농장 개는 구조됐지만 15마리 소는 남아
지난 2월 인천 계양구 계양산 부근 불법 개농장에서 사육되던 200마리의 개들이 많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조됐다. 반면 같은 농장주가 개농장 옆에서 기르던 소 15마리는 도살될 위기에 처했다. 2019년 10월 태어난 이 소들은 안그래도 추석 대목을 앞두고 도축될 운명이었다. 개 구조에 나섰던 한 동물단체가 평소 농장동물 보호시설(생크추어리) 설립에 관심을 보였던 동해물에 이 소식을 알렸고, 동해물이 구조를 결정하면서 국내 첫 소 구조가 시작됐다. 동해물 활동가 한승희씨는 "'인천 소 살리기 프로젝트'는 생크추어리 설립의 시작점이 됐다"라며 "소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축산동물 생크추어리를 만드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소 구조의 첫 출발은 농장주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농장주가 그냥 소들을 팔아버리겠다고 하면 구조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낙농업에 종사해 왔다는 농장주는 남은 소를 살리자는 활동가들의 끈질긴 설득에 지자체의 철거명령이 내려진 9월 말까지 소들을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동해물은 지난 4월 농장주와 협약서를 쓰고, 6월부터 추석 전까지 소들의 구조 비용 7,500만 원을 마련하는 모금을 시작하는 한편 생크추어리 마련을 위한 작업에도 돌입했다.
15마리에게 이름 지어주고 돌봤지만…결국 6마리만 구조
활동가들은 그동안 2주에 한번 정도 소들을 찾았다. 이들 역시 소들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동해물 활동가 김보아씨는 "처음 소들을 봤을 땐 큰 감흥이 없었는데 계속 만나다 보니 소들도 성격이 각각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라며 "5월에 소들의 생김새와 특징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후 더 애정이 갔다"고 설명했다. 호기심이 많아 사진 촬영을 좋아하는 소도, 겁이 많아 가까이 오지 못하는 소도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소들이 밥을 챙겨주는 농장주가 나타나자 갑자기 소리를 내는 모습도 활동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7월 22일 모금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가운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당초 추석이었던 퇴거일정이 갑자기 8월 말로 당겨지면서 농장주가 소를 구조하려면 8월 10일 이전에 데려가야 한다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당시 구조 비용과 생크추어리 부지 마련을 하지 못한 동해물에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임시보호처의 수용능력을 고려해 15마리 중 6마리만 구조가 가능했다. 구조 기준은 세 칸으로 나뉜 축사 중 이동을 위해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순서로 정했다. 왼쪽 칸 5마리와 왼쪽 칸과 중간 칸의 가림막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왼쪽으로 넘어온 1마리가 구조 대상에 포함됐다. 그렇게 정해진 소들은 머위, 메밀, 미나리, 부들, 창포, 엉이였다.
6개월 맡아준다는 한우농가에 임시 거처 마련
사실 소 구조만큼이나 중요한 건 이들의 갈 곳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생크추어리를 짓기 위해서는 당장 부지를 찾아야 하는데 단기간에 축사 허가가 난 공간이면서 살처분 위험을 고려해 근처에 축사나 도살장이 없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빈 축사를 대여하겠다는 농장주도 있었지만 막판에 무산됐다. 한승희씨는 "농장주가 처음에는 빈 축사를 대여해주려 했지만 마지막에 마음을 바꿨다"며 "농장주로부터 개, 고양이도 아니고 왜 먹는 소를 구하냐는 얘길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던 중 동해물 자문위원인 가수 전범선씨로부터 강원 인제군에서 한우농가 하늘내린목장을 운영하는 권충교(46)씨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권씨는 "살아 있는 생명인데 갈 데가 없다고 해서 받아주기로 했다"라며 "너무 오랫동안은 도와줄 수 없어 딱 6개월간 돌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6마리 소들의 이동도 큰일이었다. 소들은 경기 파주시에서 태어나 4개월 때 인천 목장으로 온 후 한 번도 이동해본 적이 없다. 큰 트럭에 타는 것 자체가 소에겐 공포스러웠을 거라는 게 한씨의 설명이다. 그는 "소들이 만원버스에 탄 것처럼 3시간 가량을 서서 가야 했다"며 "다행히 소들이 잘 견뎌줬고 무사히 인제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 동물은 없다
활동가들이 소를 구조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 중 하나는 "(고기, 우유를 얻기 위한) 목적이 있는 동물 아니냐"는 것이었다. 또 소를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드는데 소가 죽을 때까지 계속 키울 수 있겠냐, 계속 보호하거나 기르는 건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고 한다. 한승희씨는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 동물은 없다"며 "먹기 위해 기르는 것을 너무 당연시 하고 있다. 하지만 반려동물, 농장동물이라는 용도도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다"고 말했다.
한씨는 지난해 전남 구례에서 수해 발생 시 지붕 위와 절로 피신한 소들의 얘기를 꺼냈다. 당시 시민들 사이에선 살기 위해 애쓴 소들에 대해 '불쌍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는 "살고 싶어 하는 소들의 모습은 사람들이 소를 먹는 동물이 아니라 새끼를 지키는 모성애와 의리가 있고,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생명체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먹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선 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걸 보여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며 "실제 해외에서 축산농가의 전업을 도운 프로젝트가 있는데 농장주가 닭을 '제품'이 아닌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됐다는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안정 찾아가는 소 6마리, 하지만 다시 살 곳 찾아야
한우농가에 온 소들의 상태는 대체로 좋아 보였다.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보이는 소들도 있었다. 머위는 활동가가 직접 건네준 건초를 받아 먹었고, 메밀은 앞에 앉은 활동가를 한참 쳐다보는가 하면 활동가가 코를 만져보는 것도 허락했다.
소들은 새로운 환경이지만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이전 농장과 달리 이곳에선 건초와 곡물을 먹기 위해서는 이른바 '자동 목걸이'라고 불리는 스타치온에 머리를 넣어야 하는데, 메밀을 제외하고는 모두 3일 만에 성공했다. 몸에서 심하게 나던 냄새도 줄었고, 변의 상태도 좋아졌다. 농장주 권씨는 "도축 전 몸을 불리기 위해 사료를 과하게 먹여 소들의 소화기관이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며 "지금은 곡물과 건초를 섞어 먹이면서 위장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씨도 홀스타인 소를 키우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소들을 자세히 보게 되면서 각각 소의 성격도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엉이가 성격이 가장 세고, 머위는 옆 칸에 머리를 들이대기도 해 머리가 끼기도 했다”라며 "각각 다 개성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를 구조하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면서도 "이곳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돌보겠지만 활동가들이 앞으로 무한정 소를 키울 수 있을지,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권씨의 도움으로 한숨은 돌렸지만 동해물은 지금부터 생크추어리 부지 마련과 또 다른 임시 보호처 찾기에 나서고 있다. 한승희씨는 "계속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도 소들에겐 스트레스다"며 "궁극적으로는 생크추어리를 확보해야 하지만 그 전까지 안정적으로 보호할 공간을 찾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인제=고은경 애니로그랩장 scoopk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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