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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여성의 곁을 지킨 '여성의 전화'의 대모

입력
2021.09.06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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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자(1943.3.18~ 2021.8.2)

이문자는 1988년 '여성의전화' 상담 자원봉사를 시작해 단체 대표와 여성쉼터 관장,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여성의전화의 대모"같은 사람이다. 그는 정년퇴임 후에도 도움을 청하는 지부들의 일을 거들며 숨질 때까지 만 33년 동안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지원했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조직에 새로 오고 현장을 떠났지만 그는 "한눈팔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고, 그럼으로써 NGO의 본령과 현장활동가의 존엄을 함께 지켰다. 여성의전화 이문자 추모사이트(moonjalee.modoo.at)에서.

이문자는 1988년 '여성의전화' 상담 자원봉사를 시작해 단체 대표와 여성쉼터 관장,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여성의전화의 대모"같은 사람이다. 그는 정년퇴임 후에도 도움을 청하는 지부들의 일을 거들며 숨질 때까지 만 33년 동안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지원했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조직에 새로 오고 현장을 떠났지만 그는 "한눈팔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고, 그럼으로써 NGO의 본령과 현장활동가의 존엄을 함께 지켰다. 여성의전화 이문자 추모사이트(moonjalee.modoo.at)에서.

한국 여성운동이 종속적 부문운동에서 벗어나 여성주의(페미니즘)의 독자적 운동으로 갈래를 형성한 시기를 여성사 학계는 1980년대 어름으로 본다. 도식화하면 여성운동은 개화기 신여성의 계몽-교육운동으로 시작돼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계급운동과 구국-독립운동에 동참했고, 해방 직후에는 이념 정치단체의 선전 혹은 구호-선도 활동에 머물거나 직능단체의 권익운동에 치우친 경향이 강했다. 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 들어 여러 단체가 가족법 개정과 여성노동인권 등 젠더 이슈를 부각했지만 그 역시 반독재-사회민주화운동의 큰 흐름 안에 있었다.
저 오랜 활동 경험과 반성 위에서, 70년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학습한 활동가들은 79년 독재 권력의 붕괴와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치며 스스로를 조직화하며 젠더 차별-억압의 근원적 문제로 눈을 돌렸다. 신군부가 올림픽 유치 등을 통해 학살의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던 무렵인 1983년, '서울의 봄'의 좌절과 위축감을 떨쳐낸 활동가들이 6월 11일 '여성의전화'를, 6월 18일 '여성 평우회'를 각각 창립했다.

"(우리의 목적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아내들과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돕고 가정에서 폭력을 추방하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심리적 건강에 기여"하며 "여성들에게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모든 제도나 관습, 인습을 없애고 남녀의 평등한 인격 관계를 수립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는 데 있다."(여성의전화 창립취지문)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한국 여성은 가부장적 제도의 희생자요, 산업사회의 소외된 계층이고 국토 분단의 비극적 피해자다.(...) 한국 여성이여, 우리 모두 단결하여 여성의 인간화 운동에 앞장서 나가자."(여성평우회 발기취지문)

여성의전화의 역사와 함께 한 '맏언니'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등 제도-정치 투쟁과 활동가 재생산을 위한 이념 교육에 치중하던 '평우회'는 80년대 중반 운동 진영의 이념-노선 갈등과 분열 속에 87년 8월 해산했다. 활동가 일부는 노동운동과 제도권, 87년 출범한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로 무대를 옮겼다.
이념보다는 현실, 즉 가정폭력 성폭력이라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문제와 대치했던 여성의전화(이하 '여전')는, 역설적으로 너무나 만연한 범죄적 사례들 덕에, 공감과 분노라 해도 좋을 '현장의 힘' 덕에, 조직의 역량과 규모를 키우며 운동체로서의 정체성도 심화해왔다. 서울 중구의 한 건물 옥탑방에서, 전화기 달랑 한 대로 문을 연 여전은 2021년 현재 전국 25개 지부에 32개 상담소와 10곳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를 둔 우람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가정폭력 성폭력이란 말 자체가 아예 없거나 대부분 생경해하던 때였다. 작가 박완서가 여전 사무소 개소식 축사에서 언급한 '여자 팔자'란 게 가정폭력을 아우른 잔혹한 일상어였고, 남의 가정사는 모른 척하는 게 미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창립 첫해 여전이 서울지역 기혼여성 708명을 상대로 벌인 한국 최초 가정폭력 실태조사의 공식 용어도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구타'였다. 조사 결과 구타 당한 경험이 있는 이는 응답자의 42.2%였다. 그해 약 6개월 동안 여전에는 4,000여 통의 전화가 쇄도했다.

이문자(1943.3.18~ 2021.8.2)는 광의의 젠더폭력 피해자였다가 활동가로 변신해 여전의 역사를 몸으로 지탱해온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88년 자원봉사자로 여전과 인연을 맺은 이래 상담부장과 단체 대표, 부설 쉼터 관장, 여성인권상담소장 등을 역임했고, 오늘날 여전 안팎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수많은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간여했고, 성폭력관련법 제정 등 여러 정책적 진전을 위한 청문회-토론회와 투쟁을 이끌거나 동참했다. 저 세월 동안 그는 피해 여성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정년퇴직 후에도 김포 성남 등 지역 여전 활동을 거들었다. 선후배-동료 활동가들이 정당의 공천을 받아 정치인이 되고, 관변 여성단체나 공직의 장을 맡아 떠나는 동안에도 그는, 적어도 이력으로 드러난 바 울타리 너머를 기웃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안으로, 피해여성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했다. 90년대 말 정년에 가까운 나이로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여성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복지학을, 다시 말해 이론보다는 실천적-실용적 전공을 선택한 까닭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외적 활동이 드물었던 탓에 그는 진영 바깥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랬기 때문에 여전의 현역-베테랑 활동가들은 그를 조직의 '대모'나 '맏언니' 혹은 '끈끈이 같은 존재'라 부르며 존경했다. 또 그럼으로써 그리 길지않은 한국 여성운동-시민운동 역사에서 NGO의 참된 가치와 현장 활동가의 위태로운 존엄을 지켜냈다. 이문자가 별세했다. 향년 78세.

이문자는 여성의전화를 알게 되면서 여성주의를 배웠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자매애를 경험하면서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얻고 배운 것들을 피해 여성들에게 최대한 많이 나눠주고자 했고, 그 일을 평생 사명이자 보람으로 여겼다. 사진은 여성의전화 후배들이 준비한 회갑파티 케이크 앞의 그. moonjalee.modoo.at

이문자는 여성의전화를 알게 되면서 여성주의를 배웠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자매애를 경험하면서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얻고 배운 것들을 피해 여성들에게 최대한 많이 나눠주고자 했고, 그 일을 평생 사명이자 보람으로 여겼다. 사진은 여성의전화 후배들이 준비한 회갑파티 케이크 앞의 그. moonjalee.modoo.at

이문자는 충북 영동군수를 거쳐 상공부(현 산자부) 고위 공무원을 지내고 두 차례 총선에도 출마한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6남매 중 넷째로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선거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하면서 성장기의 그는 가난에 길들어야 했고, 장남-장녀와 막내아들-딸 사이에 끼어 별 존재감 없이 성장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그 덕에 독립심과 자립심을 기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 중앙여고와 이화여대(도서관학)를 졸업하고, TBC(옛 동양방송)에 취직해 음악부에서 근무하던 중 '서울대 나온' 남자를 만나 77년 결혼, 아들 둘을 낳은 뒤 83년 이혼했다.

홀몸으로 외아들을 키우며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권위적인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종 절대 복종을 요구했고, 남편은 고부간의 갈등을 나 몰라라 했다고 한다. 그는 위자료도 자녀 양육권도 얻지 못한 채 시어머니에게서 '소박맞은 년'이란 말까지 들으며 사실상 쫓겨났고, 이후 시어머니를 상대로 결혼 파탄의 책임을 묻는 위자료 청구소송을 벌였지만 패소했다. 시어머니에게 소송을 건 것 자체가 당시로선 파격이었고, 다수에겐 패덕이었을 것이다. 훗날 그는 파경의 사유를 '고부갈등' 즉 여성-여성의 갈등으로 치환하는 데 반대하며 광의의 젠더차별(의식)에서 기인한 '시집갈등'이라 불렀고, 그 역시 가부장적 사회구조로로부터 '심리적으로 매 맞는 아내'였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 어디에서나 용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이다.

'왜 여성주의 상담인가'(한울아카데미)의 이문자 에세이에서.

2005년 책 '왜 여성주의 상담인가'에 수록된 자전 에세이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세상을 보다'에 이문자는 아이들과의 생이별을 자초했다는 자책감과 이혼 직후의 고립감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긴 고통의 시간(결혼생활)을 보내고, 이제는 다 잃은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친정 어머니도 숨진 뒤였고, 아버지는 젊은 여성과 재혼해 깨를 볶고 있었고, 하소연이라도 할 만한 자매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 살던 때였다.
1988년 '변월수 사건'이 터졌다. 강간하려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자른 혐의(상해)로 피의자가 된 32세 여성 변월수에게 1심 법원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며, 판결문에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의 혀를 잘라..."라 썼다. 이문자가 여전과 인연을 맺은 게 그해였다.
그는 한 후배의 소개로 88년 3월 여전 상담원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해 6월 한 바닷가에서 가진 수련회에서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렵사리 털어놓자 모두가 이혼의 용기를 칭찬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자리의 감동을 그는 평생 마음에 새겼고, "(그것이)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였다"고 훗날 썼다. 그는 만 2년 자원봉사자로 일한 뒤 정식 상담자가 됐다. 상근자 월급이 40만원쯤이던 시절이었다.

운동사적 의미와 별개로, 피해 여성에게 여전은 존재 자체로서 벅찬 존재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에 전화를 거는 이들은, 대부분 경찰 보호나 가족의 응원을 못 받고, 수치심 등 여러 사정 때문에 지인에게도 도움을 청하거나 받을 수 없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가정폭력으로 여전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 '양육비해결총연합회' 부대표 손민희(1983~) 씨는 "상담자의 따듯한 말 한마디, '걱정 마세요~ 저희가(경찰이) 곧 갈 거예요. 도와드릴게요'라는 말이 피해 여성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무기력과 학습된 체념에 '내가 죽어야 고통도 끝나리라' 생각해온 이들에게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보듬어주고, 쉼터를 내주고, 법률 상담을 제공하는 게 이문자가 평생 해온 일이자 여전의 일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해자들의 사연은 상담자에게도 좌절과 절망, 학습된 무기력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활동가들도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들, 달라지지 않는 듯한 현실과 현실보다 더 완강한 법과 제도와 관습과 의식, 늘 빠듯해서 헐떡여야 간신히 버티는 물적-인적 자원의 한계…. 상담자들은 먼저 지쳐 주저앉지 않기 위해, 피해자들 곁에 든든한 존재로 서 있기 위해 버텨야 한다.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 구조의 불의와도 싸워야 하고, 토론하고 학습하며 여성주의 상담이론과 역량도 길러야 하고, 뒤를 이를 전문 상담가들을 양성해야 한다. 그 모든 것도 여전의 일이고 이문자의 일이었다.


97년 한국여성의전화는 '연합'으로 개편됐다. 분가한 '서울여성의전화' 초대회장(이상덕)이 이듬해 청와대 여성특위 조정관으로 발탁되면서 이문자는 회장이 됐다. 그 무렵 한 인터뷰에서 그는 "회장 자격이 안 되는데 오랫동안 상담 일을 해오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된 것"이라고 말했다. 만 4년 상담활동을 거쳐 92년부터 약 8년간 쉼터 관장으로 재직하며 "독신이었던 덕에" 여성들과 숙식까지 함께하며 가족처럼 지내온 그였다. 이후 그는 한국여성의전화연합 공동대표(2000~03), 여전 여성인권상담소 소장(2003~05), 정년 후 김포 여성의전화 상담소장과 강북여성인권연대 대표(2006)를 지냈고, 상담자들의 실무를 코칭하며 전문 상담 역량을 강화해주는 직책인 '여성주의상담 슈퍼바이저'로 일했다.
93년 성폭력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97년 가정폭력범죄 처벌 특례법과 피해자 지원법이 제정됐다. 모든 여성단체가 함께 이룬 성과였지만, 여전이 없었다면 훨씬 더디었을 진전이었다.

때로는 거칠고, 또 자애로웠던 '전문가'

한편 현실 정치의 완고한 장벽을 경험한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90년대 중반 무렵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여성의 정치세력화)의 필요성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의 상당수 활동이 정치 지형, 더 엄밀히 말해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는 1992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점차 현실화했고,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을 기점으로 본격화했다. 시민운동의 자율성 및 시민단체의 정치권력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도 조직 안팎에서 함께 제기돼왔지만, 추세를 거스르진 못했다.
그 사안에 대한 이문자의 입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도 정치참여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도 있고, 달리 말하는 취재원도 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거나 기록한 적이 없었고, 어쩌면 자기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유력 정치인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 혹은 수많은 이들이 함께 이룬 뭔가를 보여주는 돋보이는 자리에 나선 적이 거의 없었다.

타협이 정치력의 주요한 일부라면, 이문자는 정치력 있는 활동가가 아니었다. 입에 발린 소리를 혐오했고 스스로도 자신을 직설적이라고, "때로는 거칠고 다혈질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2000년대 중반 여성폭력피해자지원단체 협의회 총회장에서 '미국서 가족학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후반 남성이 여성폭력 현장과는 다소 무관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한 활동가는 "그 말을 듣던 이문자 선생님이 '전문가는 현장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오래 해온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고 했다.
2018년 '배드파더스'라는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공개 사이트를 운영하며 '양육비해결총연합회'를 설립해 이끌어온, 조카 이영씨도 고모 이문자를 "살가운 분이라고 말하긴 힘든, 어려운 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고모는 결코 남에게 치대지 않는 독립적인 성향의 여성이셨다"고, "일상에서도 부당하거나 잘못된 일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니어서, 피해자를 대할 때도 상담과 위로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깊이 고뇌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고모여서, 이영씨는 새 단체를 꾸려 활동을 시작하면서도 '의존하고 치대는' 인상을 줄까 봐 고모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문을 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영씨가 2000년대 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친구를 고모에게 소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듣는 사람조차 답답해 할 만큼 '바보 같이 너무 착하기만 한 친구'여서, 혹시 고모가 호통이라도 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웬걸 그렇게 자상할 수 없더라고, 조근조근 위로하고 격려하며 조언을 건네는 모습이 "진짜 내 고모 맞나 싶더라"고 했다. 이문자는 내담자에게서 젊은 날 수련회 바닷가에 앉아 있던 자신을 보고, 그를 보듬어주며 '임파워먼트'를 알게 한 동료들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곤 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이문자가 생각하는 '전문가'였다.
2013년 여전 후배들이 마련한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 이문자 고희파티' 에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 팔지 않았다"고 "여전은 내 삶"이라고 말했다.

2013년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 이문자의 고희파티'에서 그가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꽃향기에 이끌린 것인지, 그걸 핑계 삼아 젖은 얼굴을 감추려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희 파티를 열어줄 수 있는 선배가 곁에 있(었)다는 것도 조직의 자랑스러운 역사일 것이다. moonjalee.modoo.at

2013년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 이문자의 고희파티'에서 그가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꽃향기에 이끌린 것인지, 그걸 핑계 삼아 젖은 얼굴을 감추려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희 파티를 열어줄 수 있는 선배가 곁에 있(었)다는 것도 조직의 자랑스러운 역사일 것이다. moonjalee.modoo.at

은퇴 후 그는 서울 마포의 작은 빌라에서 혼자 지내며 지역 독서 모임과 후배들과의 산책 모임 등으로 활동적인 말년을 보냈다. 연금과 '노인 일자리' 월급 28만원까지 합쳐 월 100만원 남짓 되는 돈이 그의 수입의 다였다고 했다. 생전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가난한 독거노인"이라 말하곤 했다지만, 그건 농담도 엄살도 아니었다. 그의 사정을 아는 후배들이 언젠가 1박2일 여행을 함께 한 뒤 그의 몫의 경비를 대신 부담하려 하자, 버럭 역정을 내며 "이러면 함께 안 놀겠다"고 하더라고, 한 후배는 전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로 모임도 활동도 줄었고 '노인 일자리'도 끊겼다. 그는 좀 더 고독해졌고, 가난해졌다.
가까운 후배들은 개별적으로 연락해서 만나는 것과 별개로, '문자리 산책방' 'With 이문자' 등 이름을 붙인 정기모임을 만들어 그의 안부를 챙겼다. 그는 8월 2일 모임에 참여하지 못했다.

최윤필 기자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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