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워터스’로 본 환경오염 문제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난 생존이 아니라 생활을 하고 싶다고!”
애니메이션 ‘월-E’(2008) 속 선장의 대사
갑작스레 몸이 아픕니다. 자신 만이 아닙니다. 주변사람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 신세를 집니다. 원인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오래 전 동네 근처에 생긴 공장이 의심스럽습니다. 지역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마운 곳으로 여겼는데,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 하천으로 내보내는 폐수가 심상치 않습니다. 역학 조사를 했는데, 사람들의 병은 결국 환경오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업화가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선진국 문턱을 밟았다는 한국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첨단에 신경이 온통 쏠려 있는 사회는 무신경하고, 공해 기업은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국민의 건강과 목숨을 책임져야 할 정부는 문제 해결에 굼뜨기만 합니다. 최근 한국일보가 집중 취재해 보도하고 있는 ‘국가가 버린 주민들’ 시리즈를 읽다 보면 공해 문제에 있어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한국 사회에 놀라게 됩니다.
환경오염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통 받는데, 의심스러운 기업은 법과 돈을 방패 삼아 사태를 호도합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다크 워터스’(2019)는 초거대기업 듀폰의 비열한 행태를 다루는데, ‘국가가 버린 주민들’ 시리즈 속 상황과 닮았습니다.
①의심스러운 초거대기업
1998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법무법인 변호사 롭(마크 러팔로)은 예기치 않은 손님을 맞이합니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초로의 목축업자 윌버(빌 캠프)였습니다. 롭은 듀폰 공장 때문에 자신의 젖소들이 몰살 당했다고 주장하는 윌버가 달갑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인데다가 환경 문제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라서죠. 롭은 윌버가 할머니 동네 지인이라는 점에 신경이 쓰여 할머니를 만날 겸 윌버 목장을 방문합니다.
롭이 어렸을 적 뛰놀기도 했던 윌버 목장은 디스토피아의 모습입니다. 젖소는 얼마 없고, 무덤들이 여럿입니다. 이상 증후를 보이다 쓰러져 목숨을 잃은 소가 190마리. “처음에는 한 마리씩 묻어줬지. 가족이니까. 나중에 너무 많아져서 쌓아놓고 불을 질렀어.” 윌버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합니다. 인근에 공장을 둔 화학기업 듀폰이 자신의 목장 옆 동생의 땅을 사서 폐기물을 묻은 후 벌어진 일이라고 합니다. 듀폰에 항의 섞인 질의를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환경 당국에 실태 조사를 요구해도 무응답이라고 윌버는 하소연합니다.
롭은 미쳐 날뛰는 소가 자신에게 돌진하려던 모습을 보고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듀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합니다. 안면이 있던 듀폰 중역은 “고작 농부 때문에 경력을 망치고 싶나… 촌놈 따위가”라며 막말로 롭을 압박합니다. 롭이 소송을 제기하자 듀폰은 자신 있다는 듯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를 보냅니다.
듀폰과의 싸움은 높다란 장벽을 넘는 것과 같습니다. 듀폰은 실력 있는 화학자들 대부분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화학에 젬병인 롭에게 자문해줄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습니다. 정부 규제는 허술한데다 담당 관료는 거대 기업에 호의적이어서 듀폰을 단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②누군가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
롭은 서류를 조사하다 놀라운 사실을 하나 둘 알게 됩니다. 듀폰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테프론이라는 신비로운 화학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놀라운 효과를 지닌 기술인데 심각한 유해성을 지녔습니다. 듀폰은 공장 노동자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앓아 눕자 자체 실험을 통해 무서운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비밀로 감춘 채 돈벌이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듀폰은 테프론 생산 과정에서 나온 온갖 유해물질을 윌버의 목장 주변에 매립했고, 유해물질은 윌버의 가족과 젖소의 몸을 파고들었던 거죠.
롭이 하나 둘 진실을 밝히자 듀폰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윌버와의 합의를 통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려 합니다. 롭은 윌버를 위해 합의에 응하면서도 듀폰과의 싸움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프론의 위해성이 윌버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테프론은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 등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습니다. 환경오염은 누군가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라는 걸 직감한 거죠.
롭은 듀폰 공장이 위치한 웨스트 버니지아주 파커즈버그 주민들을 대상으로 피해 사실을 모집합니다. 화학물질이 장기적으로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추적 조사에 나섭니다. 듀폰이 테프론의 위험성 은폐 혐의로 벌금 1,600만 달러를 내놓게 하는 성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듀폰은 테프론으로 여전히 연간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립니다.
③양심이 작동해야 제대로 된 사회
롭이 듀폰과 싸우는 과정에서 힘이 돼주는 원군이 적지 않습니다.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건 롭이 소속된 로펌 태프트입니다. 태프트는 다우 등 화학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있습니다. 듀폰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잠재 고객입니다. 막대한 이익을 안겨 줄 수 있는 듀폰을 상대로 한 소송을 지원한다는 건 회사로선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태프트의 대표 변호사 터프(팀 로빈스)가 듀폰과의 소송이 미칠 악영향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롭이 듀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할 때쯤 슬쩍 견제하기도 합니다. 롭이 파커즈버그 주민들을 대변해 집단 소송에 나서려 하자 터프는 파트너들을 소집해 회의를 합니다. 혼자만 결정해서는 안 될, 회사의 주요 현안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파트너들은 역시나 우려를 표하며 반대 입장을 내비칩니다. “우리 로펌이 유난하다고 보여줄 이 행위”라고 롭의 소송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 생각할 듯한 터프는 이 지점에서 버럭 화를 냅니다.
“이 친구가 수집한 증거를 제대로 보기나 했어? 다들 좀 읽어! 듀폰의 미필적 고의와 부패 혐의를 파악하고 난 뒤에나 우리가 그걸 방관해야 할지 말지를 얘기해! 이래서 미국인들이 변호사를 싫어하는 거야. 이런 게 다 전 세계 시민운동의 불씨가 되는 거고. 우리는 듀폰을 잡고 싶어 해야 해! 미국 기업이란 게 이거보단 나아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은 기업은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하고. 우린 항상 법인도 사람이라고 말하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선을 넘었어. 빌어먹을 놈들!”
양심이 작동해야 제대로 된 사회라는 평범한 진리를 이토록 가슴 울리게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요.
④용기가 누군가의 힘이 될 때
영화는 자세히 소개하지 않지만 롭은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이름난 고교와 대학을 나오지 않고 변호사가 된 후 로펌에서 성실하게 일해 파트너 변호사가 됐습니다. 오랜 시간 고생한 대가로 물질적 혜택이 주어질 때쯤 롭은 듀폰과의 소송에 나섭니다.
거대 기업과의 싸움은 그에게 여러 손실을 안깁니다. 고객은 끊기고 실적이 없으니 연봉은 매년 깎입니다. 소송에 참여한 주민들의 불평불만까지 견뎌야 합니다. 일자리를 만들어준 고마운 기업 듀폰을 공격한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이들 양육에 신경을 못 쓸 정도로 시간을 뺏기고 건강까지 해쳤는데도 그가 듀폰과의 싸움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는 공공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영화 초반부 롭은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길에서 옆길로 빠질 때 방향지시등을 켭니다. 롭이 사소한 것에서조차 준법정신을 발휘하고, 큰 이익이 돌아오지 않아도 모두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라는 걸 영화는, 이 장면만으로도 암시합니다.
모두가 침묵할 때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건 고통스럽습니다. 롭의 소송은 2015년이 되어서야 첫 재판으로 결실 맺습니다. 듀폰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3,535건에 대해 6억7,700만 달러를 배상했습니다. 여러 기업을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국가가 버린 주민들’ 속 당사자들 역시 온당한 결과물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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