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주한미군 철수의 조건
편집자주
2014년 잠시 연재했던 ‘정승임의 궁금하군’을 다시 새롭게 시작합니다. 군 세계에 정통한 고수보다는 ‘군알못’(군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는 글을 씁니다.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미국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현지에서 완전 철수했습니다. 크리스 도나휴 미 육군 82공수사단장이 마지막으로 아프간 수도 카불을 떠나는 C-17수송기에 오르며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을 끝낸 겁니다. 20년간 2조2,610억 달러(약 2,600조 원)를 쏟아붓고 미군 2,461명이 숨졌지만 아프간 재건에는 끝내 실패한 ‘허무한 퇴장’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주한미군에 있습니다. 미군이 철수에 돌입하자마자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건 탈출 행렬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70년 넘게 주둔한 미군이 혹여나 한반도를 떠나면 북한군이 탈레반처럼 활개 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탓입니다. 일각에선 “인천공항이 카불공항처럼 되지 말란 법이 있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지요. 더구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미국 국익과 관계없는 다른 나라 분쟁에 주둔하며 싸우는 과거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군이 먼저 철수하는 일은 없을 것”
이런 우려와 달리 전문가들은 “미국이 미치지 않는 이상,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미국의 국익과 직결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급부상 견제가 제1의 목표인 미국에 경기 평택 험프리스 주한미군 기지만큼 좋은 땅이 없다는 거지요. 대중국 방어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넓히는 차원에서 주한미군 수를 감축할 순 있어도 완전 철수는 어리석은 결정이란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아프간전 종식을 선언하며 중국 견제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충수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철수한다고 하면 우리는 ‘핵무장’ 카드를 꺼낼 것이니까요. 핵을 보유한 북한을 홀로 상대하려면 한국도 핵을 갖겠다고 나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이 핵을 가지면 일본도, 대만도 가만 있을 리 없고요. NPT는 1967년 1월 이전에 핵 개발을 완료한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만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데 이것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가 됩니다. 미국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군이 완전히 한국을 떠나는 시점은 언제일까요. 주한미군 철수가 한미동맹 해체를 의미할 정도로 그 끈끈함이 남다르다 해도, 미국과 우리가 원래 한 몸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주둔하기 시작해 75세가 넘은 주한미군의 수명이 궁금해집니다.
①필리핀처럼 한국이 원치 않으면 당장 떠난다
미군을 당장 떠나 보내는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우리가 “나가달라”고 하면 됩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5일 “아무리 전략적 이득이 막대해도 주둔국이 나가라고 하면 미군은 역사적으로 미련 없이 철수를 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1992년 주필리핀 미군 철수입니다.
1898년부터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1946년 독립에 성공했지만 미군의 주둔은 계속됐습니다. 군사적ㆍ정치적으로 서로가 원해서였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미국은 군사기지로서 필리핀의 중요성을 느꼈고, 신생독립국인 필리핀 역시 미국의 후원이 절실했던 거지요. 그러나 1986년 ‘피플파워’로 불리는 민중항쟁 당시 필리핀 국민들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반미운동을 벌이며 미군 철수를 관철시켰습니다. 1987년 마련된 신헌법에 ‘미군이 필리핀에서 자체기지를 운영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고, 필리핀 의회가 1992년 클라크 미군기지 유지 연장 불허 결정을 내리면서 결국 철수한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미군이 떠나자마자 필리핀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남중국해 스카버러 암초를 중국이 무력으로 점령했고, 외국 투자자들은 안보 리스크가 커진 필리핀을 외면한 겁니다. 필리핀만큼은 아니지만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전략적 손실도 컸고요. 서로의 필요성을 다시 느낀 양국은 1999년 방문군협정(VFA)을 맺어 매년 2~3주간 합동군사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체결해 재난재해와 테러 대응에서도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필리핀 사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한국이 먼저 미군더러 나가라고 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당장 외국인 투자자 비중이 50%가 넘는 삼성전자 주식부터 곤두박질칠 테니까요. 미군 철수로 북한이 쳐들어오기 쉬워진 화약고에 돈을 묻어둘 투자자는 없습니다. 국민 10명 중 1명이 보유한 국민주인데, 주식이 폭락하면 정권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리스크가 엄청날 겁니다.
무엇보다 핵이 없는 우리가 먼저 철수를 요구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주한미군 존재 자체가 핵우산의 징표니까요. 1953년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자동개입 조항’이 명시되지 않아, 미국이 유사시에 우리를 외면할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미군이 한반도에 상주하면 북핵 위협에 액션을 안 취할 수 없겠지요. 부형욱 한국국방연구원(KIDA) 책임연구위원은 “주한미군 2만8,500명과 20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튼튼한 핵우산임을 보여준다”고 강조했습니다.
②북핵 폐기하고 평화협정 선언하면?
북핵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면 어떨까요.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한 핵무기가 모두 폐기되고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돼 남북 간에 실질적 힘의 균형이 이뤄지면 주한미군 문제를 유연하게 논의해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도 급물살을 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미가 합의한 전작권 전환의 3가지 조건 중 하나가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역내 안보환경’입니다. 현재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있는 전작권을 한국군 4성 장군이 행사하게 되면 미군 철수 논의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구조인 거지요.
북핵 협상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협상 칩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북한에 “너희가 핵을 포기하면 주한미군도 철수하겠다”는 제안으로 핵 폐기를 유도하는 식입니다.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를 지낸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도 지난해 4월 미 싱크탱크가 주관한 화상세미나에서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이 북한의 신속한 비핵화 이행을 위한 협상카드의 일종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③종전 선언해도 계속 주둔한다
다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북 통일이 된다 해도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것이란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과거부터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렸던 강대국들이 건재한 이상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의 도움이 전략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원곤 교수는 “우리가 주변국들과 1대 1로 국방ㆍ안보 경쟁을 하는 건 비용과 효율 측면에서 부적절하다는 게 한미 전략가들 판단”이라며 “종전 후에도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균형자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중국의 급부상을 막아야 할 미국 입장에서도 균형자 역할이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더 절실할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미국이 긴장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중국의 경제적ㆍ정치적ㆍ군사적 위상이 추락하는 경우에는 어떨까요. 부형욱 책임연구위원은 “극단적으로 중국이 망하는 경우에도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야욕을 가진 나라로 성장하는 것을 막고 관리하는 차원에서 한반도 주둔을 원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코리아 패싱’
우리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단순히 주한미군 철수가 아닙니다.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미군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게 되는 상황입니다. 세계 외교의 거장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언급했던 ‘미중 빅딜론’이 대표적이지요. “중국이 북핵 폐기와 김정은 정권 붕괴를 이끌어내면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도록 미국과 중국이 사전에 합의하자”는 내용입니다. 강대국 간 서로 윈윈하는 거래로 우리의 이익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실제로 남베트남과 대만은 그 쓴맛을 봤습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대 초 수렁에 빠졌던 베트남전을 협상으로 끝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남베트남은 철저히 배제됐습니다.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과 극비리에 회동한 뒤 평화협정을 체결한 겁니다. 그러나 2년 뒤 협정을 깬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침공했고 지도상에서 남베트남은 사라졌습니다.
대만의 상황은 우리와 더 흡사해 보입니다. 미군은 1945년부터 최대 3만 명을 대만에 주둔시켰지만 1979년 미중 수교를 전후로 대만의 뒤통수를 칩니다. 중국과 협상을 통해, 대만을 통치하는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고 대만에서 미군을 철수하기로 한 겁니다. 대만의 의사와 무관한 일방적인 철군이었습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완전히 철수한 직후인 이달 2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는 ‘의회나 한국 정부 동의 없이 주한미군을 일방적으로 감축하지 못하도록 명시한 조항’을 삭제한 2022회계연도 국방수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걸핏하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마련한 안전장치가 바이든 시대에는 무의미해졌다는 게 이유였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 말만 믿었다가 ‘코리아 패싱’이 현실화하는 겁니다. 아프간 철수를 결정한 미국이 탈레반과 수차례 협상할 당시, 그 테이블에 아프간 정부가 없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싸울 의지를 잃은 것은 미국이란 동맹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배신감 때문”이라는 사미 사다트 아프간 정부군 사령관의 발언도 마찬가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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