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기후변화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 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한국일보>
언젠가 우리 집에 태양광 발전을 하려고 했었다. 듣기론 시에서 주택 태양광 설치 보조금도 일부 나오고, 전기세도 조금 아낄 수 있는 데다 태양의 수명은 앞으로 50억 년 남았으니 나쁠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초기 설치 비용은 있겠으나 날이 갈수록 효율성이 늘 테고 남는 전기는 팔 수도 있다 하니, 드디어 에코 라이프를 살게 된 거야? 이 동네가 한국에서 제일 햇빛이 잘 드는 지역도 아니고 호수도 물웅덩이도 없지만, 윌리엄 예이츠가 꿀 벌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공터에서 살리라던 '이니스프리의 호도'가 여기 있었네? 이참에 뉴욕 시민들처럼 옥상에서 벌을 칠까? 소중하게 끌어들인 태양광 아래 나의 영속적인 공중 밭에서 꿀을 채집하며 그린 에너지를 누린다는 상상만으로 나는 절반쯤 유기농 농부가 되었다.
사실 나의 두 번째 직업은 타일 붙이는 일로 하고 싶었다. 한 명이 타일을 들어내면, 다른 한 명은 작은 손수레에 담긴 시멘트를 잘 섞고, 나머지 한 명은 줄 맞춰 새 타일을 붙인다. 깨진 타일은 같은 방법으로 복구한다. 무전기로 야단법석 만들지 않고 남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 벽과 바닥을 새로 깔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내 삶의 원형을 찾은 것 같았다. 오직 옥상에 발전 설비를 설치하면 친구들과 와인 마실 공간이 없을까 봐 그것만 마음에 걸렸다.
곧 구청에서 지정한 업체 대표 아저씨가 집에 왔다. 그분은 이리저리 가늠해보더니 우리 집 옥상에는 패널을 놓을 수 없다고 단칼에 잘랐다. 실망할 새도 없었다. 간다는 말도 안 하고 순식간에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 꽁무니를 보며 그 아저씨에게 '생활형 우사인 볼트'라고 이름 붙이는 것으로 태양열 발전은 무산되었다. 여름이 지날 때 에어컨을 사랑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두둑해진 전기세 통지세에 깔린 채 지금처럼 겨울을 기다렸던 적이 언제였을까, 잠깐 떠올렸을 뿐.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들의 초기 결론과 예견 수정, 확증 편향은 올해도 여지없었다. 파리며 코펜하겐에 모여 회담하는 세계 지도자들 간의 국제적 행동 조율, 온실 가스 배출 제한에 대한 대략적인 조약과 방관자들, 이 조약을 경쟁자 공격용 먹이로 사용하는 정치가들과 역사의 수동적인 구경꾼들… 수집된 모든 정보, 그 정보와 관련된 또 다른 정보들은 고등학교 수학시간처럼 지루하게 들렸다. 꼭 카드로 부리는 묘기 같았다. 아무리 관심을 끌어도 반응이 무덤덤하기만 한.
그들은 너무 많이 약속했고 너무 조금 약속을 지켰다. 오늘 탄소 배출을 막아도 정상 기준치로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내일 화석 연료를 일절 금한다고 해도 대기 중 탄소량은 붕괴 직전이 되었다. 무수한 규약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황무지와 본 적도 없는 종(種)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파리 협정에선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로 제한하는 데 합의했다 하나 2도 더워진 세상에 삶이 어떻게 변할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무엇으로 온도를 묶어 둘지, 내내 2도 이하로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사람들 반응 역시 자원 전쟁, 정치 불안정, 대량 실업, 피난민 증가처럼 그저 방대한 상상에 머물 따름이다.
그 사이, 산에 쌓인 눈은 영원히 사라졌고, 정글은 경작지로 쓰이기 위해 불태워졌고, 빙산은 바스러져 그대로 강물에 녹아버렸고, 소위 엘리트들은 다른 사람과 같은 공기를 마셨다.
가끔 생활 속에서 처절하도록 환경을 보살피고 가치를 나누는 시민들 앞에서, 그렇지만 비 오는 날 화학 공장에서 약품 한 양동이 방류하면 게임 끝일 걸, 집에서 아무리 물의 깨끗한 정도를 따지고, 함유된 화학 성분을 체크해도 냉면집 육수는 다 수돗물일 걸,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절약의 오랜 가치, 공중 도덕과 눈에 띄지 않는 소비, 이상주의의 꿈이란 전부 헛수고일 뿐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한 사람의 시민이, 하나의 국가가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지구의 온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 지구 온난화는 완전한 사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모든 것이 기후 불안 조장자들이 만든 오작동 된 기후 모델이라는 듯. 그리곤 기후변화는 음모론이며, 과장되었고, 존재하지 않으며 용어 자체도 틀렸다면서 유사 과학 이론을 설교한다. 즉, 1.9도 온도 상승은 구원을 의미하지 않고, 2.1도 상승이 종말을 의미하지도 않을 것이다. 5,000만 년 전쯤 전 세계 화석 연료 자원을 다 태워버릴 만큼 엄청난 가스가 분출되어 지구가 뜨거워지긴 했지만, 그때도 다들 생존에 별 지장 없었어. 싱가포르는 세계 평균 기온보다 12.5도 높은데도 잘만 살지. 북극 분지에 악어가 사는 게 왜 문제가 되며, 한 세기 동안 대기가 빙하시대보다 훨씬 오염된 건 맞지만 늘어난 이산화탄소는 햇빛을 반사하며 대기권을 차갑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 지구 온난화는 생각만큼 심하지 않단 말이야.
그러나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기후에 대한 논의는 혼란과 방해의 연속 같기만 하다. 분위기는 비극의 드라마를 피할 수 없다는 식으로 변한다. 해수면이 예측보다 빨리 상승하고, 몇십 년 내로 강제 이주와 경제 시스템 붕괴가 지구를 통제 불가능으로 만들고 문명의 구조를 위협할 거라는 식의 열광적인 과장이 난무한다. 이때 미디어는 종말론의 미사여구에 깔려 신음소리나 낼 뿐이다.
다가오는 재앙의 무게가 속수무책으로 무겁고, 희망을 갖는 것조차 속임수 게임처럼 느끼는 이들은 차라리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같다. 가난한 시절의 향수 속에서 새로운 금욕의 시대를 준비한달까. 대공황의 상상은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빵집 앞에 늘어선 줄에 끼어 글루텐 프리인지, 시큼한 맛이 나게 반죽한 사워 도우인지 물어볼까 망설인다거나, 귀리 다이어트로 항상 갈망하던 식스 팩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때늦은 사치일 뿐. 다락을 뒤져 동네 형이 물려준 꼬질꼬질한 야상을 찾고, 양말은 꿰매 신고, 머리카락 뒤덮인 자투리 비누 조각을 모아 새 비누를 만들고, 고양이 사료를 먹다가 쥐까지 잡아먹는다. 자식의 스니커즈를 벗겨 학교까지 10㎞를 맨발로 걷게 하다가 급기야 콩팥까지 당근 마켓에 내놓는다. 그리고 감상적으로 독백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 시련이 끝나고 우리가 살찌우던 시절이 돌아오면 오직 신만이 궁핍이 무엇인지 알리라.
기후변화와 유토피아 이념은 급기야 온라인에서 불이 붙었다. 본위적 이데올로기가 없이 소견이 좁고 호전적인 사람들은 책상에 죽치고 앉아, 지구가 불타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면서 '미개한' 타인을 멸시하고 있었다. 그즈음, 시대정신으로 불타오르는 청년과 이야기를 했다. 그는 기후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전쟁보다 빨리 문명의 마지막을 가져올 거라면서, 더 뜨거워진 태양이 헬륨을 활활 태우며 용광로가 되어가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느긋한 게 진짜 놀랍다고 했다. 그에게 극한의 날씨란 어둠 속에서 벼랑을 걷는 오리무중 위험이 아니라 모두가 종말로 뛰어드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가이아 이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은, 인간의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교황보다 더한 확신으로 말했다. 사실 다윈설 같은 혁신적인 지구 과학도 일종의 생물학 아닌가. 물론 가이아는 지구가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비유일 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유기체가 될 수 없다. 재생산될 수 없으니. 그래도 그 순간, 그가 자격이 있는 인간 종(種)의 유일한 멤버처럼 느껴졌다.
사실 요즘 제일 궁금한 건 밀려오는 자연 재해며 인공적인 재해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지내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후 문제의 핵심은 누구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 9월이 되어 식어버린 태양 아래서 혼란스럽게 자문한다. 토머스 뉴커먼은 증기기관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산업혁명을 잉태하고 2억 년 동안 지구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적어도 무엇을 자각해야 할까? 자각하는 것만으로 아웃사이더인 그 친구와 땅의 여신 가이아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가이아는 땅을 축복하기 위해 인간을 선택한 걸까, 인간을 축복하기 위해 땅을 선택한 걸까?
꼭 이야기 전달 게임 같다. 내가 아는 내용을 누가 아는지 보고 다른 이들이 아는 걸 나도 이해하면 좋겠지만, 옆 사람에게 전달하면서 원래 이야기에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지는. 그래도 낙담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문제를 안고 살면 되니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